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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설교
박영재 2009-06-08 추천 0 댓글 0 조회 8588

제2회 개혁주의 설교학회 설교학 학술대회

주제: 설교가 한국교회 부흥에 미치는 영향

-한국교회 설교 강단과 설교의 미래 트렌드-

일시: 2009년 5월 11일(월) 오후4시부터

장소: 총신대학 제1종합관 2층 세미나실

진행: 정우홍 교수(Ph. D. 총신대학)

한국교회 설교 트렌드

기조 논설: 권성수 교수(Th. D. 총신대학)

한국교회 강단의 미래: 변증적 설교에서 복음적 설교에로

발제: 허도화 교수(Ph. D. 계명대학)

논평: 이철승 교수(Ph. D. 대신대학)

부흥과 설교: 부흥시대의 설교를 통해 바라본 현대 설교의 미래적 진로

발제: 이우제 교수(Th. D. 백석대학)

논평: 마문철 목사(Ph. D. 새길교회 담임)

개인주의 설교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

발제: 이승진 교수(Th. D. 실천신학대학원)

논평: 오현철 교수(Ph. D. 성결대학)

주최: 개혁주의 설교학회(회장: 권성수 교수)

(학술진흥재단 등록기관코드: 8B2450)

■ 제2회 개혁주의 설교학회 설교학 학술대회: 진행 순서 및 차례

Contents/Page

진행 및 발제, 논평자 교수 약력 -5

개혁주의 설교학회 조직표 -7

진행 순서 및 차례 -3

예배순서 및 시간표 -3

●개회예배[오후 4:00 - 4:20]

사회: 홍봉근 목사(학회 부회장)

찬송: 찬200장(통235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기도: 김성천 목사(학회 이사)

설교: 오정호 목사(학회 이사장)

본문: 사도행전 20:17-28

제목: 설교자입니까?

축사: 정훈택 총장(총신대학교 총장)

찬송: 찬435장(통492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1절)

축도: 백동조 목사(학회 부이사장)

전체 진행: 정우홍 교수(학회 부회장)

기조 논설: 한국교회 설교 트렌드: 권성수 교수(학회 회장) [오후 4:20 - 4:40] -11

한국교회 강단의 미래; 논쟁적, 변증적 설교에서 복음적 설교에로: 허도화 교수 -23

논평 - 이철승 교수 -41

4:40 - 5:10[30분] 제1강연/발제: 허도화 교수

5:10 - 5:20[10분] 논평: 이철승 교수

5:20 - 5:50[30분] 패널 토의 및 질의 응답

5:50 - 격려사 및 식사기도:

이한수 교수(총신대학 목회신학전문대학원 원장)

5:50 - 6:30 저녁식사(40분): [방명록 기록]

부흥과 설교; 부흥시대의 설교를 통해 바라본 현대 설교의 미래적 진로: 이우제 교수 -45

논평 - 마문철 목사 -67

6:30 - 7:00[30분] 제2강연/발제: 이우제 교수

7:00 - 7:10[10분] 논평: 마문철 목사

7:10 - 7:40[30분] 패널 토의 및 질의 응답

7:40 - 7:50 휴식(10분): [방명록 기록]

개인주의 설교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 이승진 교수 -73

논평 - 오현철 교수 -97

7:50 - 8:20[30분] 제3강연/발제: 이승진 교수

8:20 - 8:30[10분] 논평: 오현철 교수

8:30 - 9:00[30분] 패널 토의 및 질의 응답

■ 진행 및 발제, 논평자 교수 약력

진행자: 정우홍 교수 (학회 수석부회장)

한양대학교 (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미국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M.Div.)

미국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Ph.D.)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총신대학교 목회신학전문대학원 조교수

현, 명성교회 담임목사

저서: 「The Function of Luke 16:14-18 in Its Context(논문)」

「배경으로 본 히브리서 강해」외

기조논설(基調論說): 권성수 교수 (학회 회장)

주제: 한국교회 설교 트렌드

숭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Equiv.)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학석사 (Th.M.)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학박사 (Th.D.)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

독일 튜빙겐 대학교에서 연구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연구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총신대학교 기획실장 및 대학원장 역임

현, 총신대학 목회신학전문대학원 교수

현, 대구 경북 성시화본부 명예본부장

현, 대구동신교회 담임목사

저서: 「고린도전서」(2000년도 올해의 신학자 대상 작품)

「성령설교(2009년 출간)」외

한국교회 강단의 미래; 논쟁적, 변증적 설교에서 복음적 설교에로: 허도화 교수

논평 - 이철승 교수

발제자: 허도화 교수

서울신학대학교(Th.B.; M.Div.)

연세대학교(Th.M.)

Western Evangelical Seminary(M.A.)

Drew University(S.T.M.; M.Phil.; Ph.D.)

현재, 계명대학교 예배학/설교학 교수; 대학교회 담임목사

논평자: 이철승 교수

총신대학 (B.A.)

연세대학교 대학원 (M.Ed.)

총신대 신학대학원 (M.Div.)

남아공 University of Pretoria (Ph.D.)

현, 대신대학교 학생처장 및 실천신학 교수

현, 내일교회 교육목사

부흥과 설교; 부흥시대의 설교를 통해 바라본 현대 설교의 미래적 진로: 이우제 교수

논평 - 마문철 목사

발제자: 이우제 교수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카나다 틴델 신학대학원(Dip.)

미국 칼빈 신학대학원(Th.M)

남아공 스텔런보쉬 대학교 신학박사(Th.D)

현, 백석대학교 설교학 교수

논평자: 마문철 목사

순천대학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M.div.)

장로회신학대학 (Th.M.)

백석대학 (Ph.D.)

현, 새길교회 담임목사 (서울관악구 중앙동 소재)

개인주의 설교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 이승진 교수

논평 - 오현철 교수

발제자: 이승진 교수

합동신학대학원 (M. Div)

Stellenbosch Univ. (Th. M & Th. D, 설교학)

현, 실천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

논평자: 오현철 교수

연세대학교 (B.Sc./B.A.)

성결대학교 (B.Th.)

Canadian Theological Seminary (M.Div.)

평택대학교 대학원 (Th.M. 실천신학)

University of Pretoria (Ph.D. 설교학)

현, 성결대학교 설교학 교수

■ 개혁주의 설교학회 조직

개혁주의 설교학회 이사회

이 사 장: 오정호 목사(대전새로남교회 담임)

부이사장: 백동조 목사(목포사랑의교회 담임)

이 사: 김기철 목사(정읍성광교회 담임)

김성천 목사(여수제일교회 담임)

도원욱 목사(서울한성교회 담임)

박성규 목사(부산부전교회 담임)

이덕진 목사(서울명문교회 담임)

개혁주의 설교학회 임원

회 장: 권성수 박사

수석부회장: 정우홍 박사

부 회 장: 류응렬 박사

한근수 박사

홍봉근 목사

총 무: 박진석 목사

서 기: 김병태 박사

부 서 기: 이성남 목사

회 계: 이승수 목사

부 회 계: 박사준 목사

감 사: 김천일 목사

유장춘 박사

기조 논설(基調論說):

한국교회 설교 트렌드

발제: 권성수 교수(Th. D. 총신대학)

숭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Equiv.)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학석사 (Th.M.)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학박사 (Th.D.)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

독일 튜빙겐 대학교에서 연구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연구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총신대학교 기획실장 및 대학원장 역임

현, 총신대학 목회신학전문대학원 교수

현, 대구 경북 성시화본부 명예본부장

현, 대구동신교회 담임목사

저서: 「고린도전서」(2000년도 올해의 신학자 대상 작품)

「성령설교(2009년 출간)」외

기조 논설(基調論說):

한국교회 설교 트렌드

발제: 권성수 교수(Th. D. 총신대학)

한국교회의 설교가 지금 어떤 트렌드(trend)를 이루고 있는가? 한국교회 설교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의 설교자들은 어떤 설교를 하고 있고 앞으로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 미래는 미래에 가 보아야 알 것이다. 그러나 과거가 현재로 연결되고 현재는 미래로 흘러가기 때문에 현재의 설교 추세를 보면 미래의 설교도 전망할 수 있다. 현재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어떤 설교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한국교회 미래 설교를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미국의 설교자와 설교학자가 글을 써서 큰 영향을 미치면, 그것이 바로 한국에 소개된다. 한국의 설교자와 설교학자는 미국의 설교와 설교학에 영향을 아주 빠른 속도로 받고 있다. 특별히 ‘미국의 어떤 설교자가 어떻게 설교해서 그 교회가 잘 된다.’는 소문만 나면 한국교회는 바로 그런 설교를 따라간다. 이런 각도에서 한국교회의 설교의 트렌드를 10가지로 정리해 보는 동시에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이야기식 설교

구설교학의 설교는 성경 본문에서 하나의 핵심 명제를 찾아서 그것을 대체적으로 3대지로 전한다. 설교자가 권위를 가지고 성경의 진리를 청중에게 선포한다. 설교자는 명제적 진리를 설명하고 논증하고 예증하고 적용한다. 설교자는 청중으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여 그 진리대로 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신설교학은 설교자보다 청중을 더 중시한다. 진리의 전달보다 청중의 체험을 더 강조한다. 청중이 성경 말씀을 체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신설교학은 결론부터 내리고 그 결론을 설명하는 연역적 방식보다는 구체적인 사실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청중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하는 귀납적 방식을 사용한다. 신설교학은 주로 이야기 설교를 통해서 청중의 체험을 유발한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구설교학의 전통적인 설교를 하고 있다. 전통적인 3대지 설교를 선포적인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설교자들 중에 설교학자들을 통해서 귀납법적 이야기 설교에 대해서 들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한국교회 설교자는 전통적인 설교를 하면서 간증이나 예화를 통해서 이야기를 많이 섞어서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과거보다 의식적으로 이야기를 더 많이 섞어서 하는 것 같다. 전통적인 설교를 하면서 예화를 많이 했던 설교자도 과거에는 예화를 많이 들어서 되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가도 이제는 예화가 많이 들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앞으로 한국의 설교자는 설교에 이야기들을 종래보다 더 많이 사용할 것이다. 사실 설교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흘러가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문학적 자질이 많거나 본래 이야기꾼이라면 모르지만,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설교 한 편을 기승전결의 플롯을 가진 이야기로 작성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설교자들이 전통적인 설교 속에 이야기들을 더 많이 넣는다는 의미에서 ‘이야기식(式)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간증과 예화를 많이 들고, 생활 실화를 많이 들게 될 것이다.

한국 교회 설교자들이 이야기를 많이 섞은 이야기식 설교를 한다고 해서 청중에게 알아서 결론을 내리도록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설교자가 이야기 속에 결론을 숨겨놓을 뿐 아니라, 이야기 끝에 결론을 내리는 설교를 하는 것 같다. 앞으로 한국교회 설교자는 권위 있게 선포하기보다는 부드럽게 설득하는 이야기식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후현대의 청중은 권위적인 선포를 거절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교인들은 아직도 권위적인 선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청년들과 교육 수준이 높은 교인들은 설교자가 강단을 치면서 권위 있게 선포하는 설교에 대해서 은근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교인들은 이야기식 설교에는 별로 반감을 품지 않는다. 설교 시간에 별로 부담 없이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하는 사람도 부담이 없고, 듣는 사람도 부담이 없다. 이야기는 하는 사람도 재미가 있고, 듣는 사람도 재미가 있다.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효과가 있다. 이야기는 진리를 생생하게 전달하여 기억에 오래 남게 하는 특징이 있다. 이야기는 설교자와 청중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는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이야기 속으로 말려들게 하는 특징이 있다. 이야기는 이런 의미에서 후현대의 분위기와 잘 맞는다. 한국 교회 설교자들은 앞으로 이야기식 설교를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 설교자가 이야기식 설교를 많이 한다고 해서 성경을 포기하거나 제쳐 두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 자체에 설화가 많다. 이야기 설교는 성경의 설화 장르를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실화를 통해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야기 설교를 한다고 해서 성경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2. 성경 강해 설교

한국교회 교인들은 설교자가 성경에서 떠난다고 생각하면 아주 싫어한다. 교인들은 성경을 무시하는 설교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교인들은 성경을 본래 신성한 경전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교인들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의 내용을 설명하는 설교를 좋아한다.

강해설교는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고 적용하여 청중이 성경대로 살아가게 하는 설교이다. 강해설교는 성경과 생활을 연결시키는 설교이다. 성경 구절을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으로 해설했다고 해서 강해설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설교는 성경의 지평만 설명하는 설교이다. 성경의 자구(字句)를 주해한다고 해서 강해설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설교는 주해설교이다. 강해설교는 성경의 지평과 현실의 지평을 녹여서 하나로 묶는 설교이다. 강해설교는 성경의 지평과 현실의 지평을 융합하는 설교인 것이다.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이런 의미의 강해설교를 앞으로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정보와 지식의 시대이다. 설교자가 강해설교만 한다고 해서 교인들이 그 설교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교자가 성경도 깊이 파고, 현실도 깊이 파서, 성경과 현실을 지하수 차원에서 연결시키는 강해설교가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성경의 내용을 피상적으로 깨닫고 현실의 상황도 피상적으로 관찰하여 성경과 현실을 얇은 끈으로 연결하는 설교는 청중에게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청중이 감성 터치를 좋아하고 재미와 흥미와 유머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강해설교자가 얕은 차원에서 감성만 터치하면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얕은 강해설교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설교는 당장 들을 때는 좋을지 모르지만, 청중이 듣고 난 후에 공허감을 느낄 수 있다.

설교자가 문맥(文脈)과 사맥(史脈)과 경맥(經脈)을 깊이 살펴서 성경을 해석하고, 현실을 깊이 이해하고 설교해야 지속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정 전인(全人)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감성만이 아니라 지성과 의지까지 움직일 수 있는 깊은 강해설교라야 성경이 의도하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과 현실을 깊이 연결하는 ‘깊은 강해설교’가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전망은 현재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제자훈련을 대체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에게 제자훈련을 하는 설교자는 ‘얕은 강해설교’를 할 수가 없다. 제자훈련을 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성경을 배우고 경건서적을 읽고 상당히 높은 지적 수준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제자훈련 목회에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대부분 제자훈련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제자훈련을 하고 있다. 제자훈련을 받은 교인들은 똑똑해지기 때문에 설교자가 ‘깊은 강해설교’를 해야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성경도 깊이 보고 현실도 깊이 봐서 이 둘을 깊은 차원에서 연결시키는 강해설교가 유행할 것으로 내다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성경 장르 설교

성경은 여러 자기 장르로 되어 있다. 율법, 역사, 시, 잠언, 예언, 설화, 복음, 서신, 묵시, 비유 등. 구설교학에 따른 전통적인 설교는 서신 장르를 비교적 잘 살리는 설교라고 볼 수 있다. 신설교학에 따른 새로운 설교는 설화 장르를 비교적 잘 살리는 설교라고 볼 수 있다. 미래의 설교는 성경의 모든 장르를 살리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미래 한국의 설교는 신설교학에 영향을 받아 설화 장르를 많이 살릴 것이다. 구설교학의 영향을 계속 받아 서신 장르도 많이 살릴 것이다. 그러나 미래 한국의 설교는 성경의 다양한 장르를 다양하게 살리는 방향을 잡게 될 것이다.

설교는 성경의 본질만이 아니라 형태까지 살리는 방향을 잡아야 한다. 비유는 비유로 설교하고, 역사는 역사로 설교하고, 시는 시로 설교해야 한다. 설교자가 실제로 비유를 비유로 설교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유의 본질을 잘 이해해서 비유를 제대로 살리는 설교를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구설교학은 서신 장르를 잘 사리고 신설교학은 설화 장르를 잘 살리고 있다면, 앞으로의 설교학은 성경의 다양한 장르를 다 그대로 살리는 방향을 잡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설교학이 성경의 다양한 장르를 그대로 살리는 설교를 설교의 이상형으로 잡게 될 것이다.

4. 생활 적용 설교

최근에 우리는 전문 학자들이 이론적으로 강의하는 컨퍼런스에는 목회자들이 100여명 모이지만, 실제적으로 먹혀드는 목회 컨퍼런스에는 10,000여명이 모이는 현상을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꿩 잡는 것이 메다.”는 실용주의 격언이 잘 통한다. 가치관과 이론이 잘못된 상태에서 실용성만 추구한다면 문제가 있지만, 올바른 가치관과 이론에 근거한 실용성은 반드시 추구해야 할 것이다.

설교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청중이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청중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설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 적용시켜 주어야 한다. 생활에 적용되지 않거나 적용될 수 없는 설교를 들은 청중은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So What?)”라는 반응을 보이고 현실 생활 속으로 나아간다. 설교자는 청중이 ‘집으로 가져갈’(take home)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청중 대부분은 설교가 성경 본문에 얼마나 정확한 근거를 잡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설교자가 ‘지금 내가 살아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내가 당장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설교자는 청중의 이러한 욕구를 무시하지 말고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설교자는 청중의 ‘체감 필요’(felt needs)를 충족시켜 주되, 청중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지만 청중에게 요구되는 ‘실질 필요’(real needs)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청중은 잘 먹고 건강하게 살고 자녀 교육 잘 하고 마음이 편한 것이 좋다는 식의 ‘체감 필요’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청중이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아래로 만물을 다스리는 ‘실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설교자는 청중의 ‘체감 필요’와 ‘실질 필요’를 충족시켜 주되, 청중이 메시지를 집에 가져가서 바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 연륜이 짧을수록 설교의 적용성이 약한 편이고 설교 연륜이 길수록 적용성이 강한 편이다. 목회 초기의 설교자는 대개 성경 본문의 해석과 설명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한다. 그러다가 보니 설교의 예증과 적용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목회 경험이 많은 설교자는 청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청중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기 때문에 실제 생활에 적용되는 메시지를 상대적으로 많이 전한다.

성경의 지평과 현실의 지평을 놓고 비중을 따지기는 쉽지 않지만, 초보 설교자는 성경 본문의 해석과 설명에 설교의 80%를 할애하고 적용에 20%를 할애하는 식으로 설교한다. 베테랑 설교자는 본문 해설에 20%를 할애하고 적용에 80% 할애한다. 달통(達通)한 설교자는 아예 설교 전체가 적용이고, 설교 전체가 본문 해설이다. 성경의 지평과 생활의 지평이 녹아서 하나가 된 설교를 설교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는 것이다. 설교의 제목도 적용, 서론도 적용, 본론의 대지들도 다 적용, 결론도 물론 적용, 설교의 어투도 적용, 설교의 태도도 적용--모든 것이 적용이라는 것이다.

사실 성경을 보라.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실 때에 아담이 집에 가져가지 못할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그래서 어쩌란 말씀입니까? 왜 그렇게 허공에 매단 말씀을 하십니까?”라는 반응을 보일만한 말씀이 있었는가?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하실 때에 다윗이 적용하지 못할 말씀이 있었는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최후통첩 계시를 하실 때에 예수님이 은하수 세계 얘기를 하신 적이 있는가? 물론 제자들과 당시 청중이 이해하기에 어려운 말씀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가? 바울 서신을 볼 때 바울이 준 어떤 말씀이 생활과 무관한 것이 있었는가? 성경 전체가 ‘생활’의 말씀이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살아가도록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훈련하는’ 책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교계에서 소위 히트를 치고 있는 설교자들은 다 적용이 강한 설교를 하고 있다. 청중이 적용이 강한 메신저를 요구하기 때문에 적용이 강한 설교자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성인들을 상대한 설교자도 적용이 강한 설교자가 영향력이 강하다. 청소년을 상대한 설교자도 적용이 강한 설교자가 인기와 영향의 폭이 넓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다.

적용이 강한 메시지를 전해야 할 이유는 이렇게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적용은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세상의 처세술, 리더십, 심리학, 상담학, 경영학, 마케팅 등의 베스트셀러에서 추출한 메시지를 ‘성경적 메시지’로 가장하거나 포장해서 적용 설교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온 데 간 데 없고 인간의 소리, 인간의 소음만 남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인간의 전통이 판을 치게 된다. 말씀의 적실성을 살리되 성경에 정초한 적실성을 살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교자가 진리를 전할 때에는 ‘손에 잡히는 진리’(Hands-on-Truth)를 전해야 하는 것이다.

5. 사회 이슈 설교

사람은 사람들의 공동체, 즉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사람들이 살아가다가 보면 이런저런 이슈들에 부딪힌다. 이슈란 그때그때 풀어가야 할 사회적인 숙제이다. 숙제는 해야 속이 후련하다. 숙제를 하지 않고 사는 것은 늘 빚쟁이에게 쫒기는 기분이다.

설교의 청중은 사회 속에서 살면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궁금증과 답답함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그것을 풀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청중에게 있다. 사회적인 숙제를 하지 않고 갑갑하게 살아가는 청중이 설교를 들으러 나온다.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 그 분야 전문가들의 말은 신문이나 TV나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를 통해서 들어야 한다. 청중은 설교자의 입을 통해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한다.

청중이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싶어 한다고 해서 설교자가 사회적인 모든 이슈를 다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가 사회적인 이슈를 다 다룰 수도 없다. 사회적인 이슈를 다룰 때에 그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이 다루면 청중이 설교자를 오히려 무엇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으로 얕잡아 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설교자가 사회적인 이슈를 다룰 때에 진보적인 성향과 복음적인 성향으로 대별되는 것 같다. 진보적인 설교자는 사회적인 이슈 중에 이념, 대북문제, 민주화, 노사분규, 문화, 예술 등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 복음적인 설교자는 사회적인 이슈들 중에 성경과 관련된 이슈들, 즉 주로 도덕적인 이슈들을 중심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요즈음 청중은 교파와 교단에 의해 교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와 자녀 교육 면에서 교회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교인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설교자의 입장이 어떤가에 따라 교회를 결정하기도 한다. 교파나 교단이라는 제도보다는 이슈에 관심을 더 두는 것이 현대의 청중이다. 이런 때에 설교자는 각 분야 전문가가 다루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설교자가 사회적인 이슈들을 다룰 때에 예수님의 모델과 성경의 모델을 따라가야 한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의 식민통치라는 사회적인 이슈가 강하게 제기되어 있었다. 로마가 세금을 포탈하는 것도 사회적인 이슈로 강하게 부각되어 있었다. 노예제도도 당시의 청중이 풀어야 할 사회적인 숙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사회적인 이슈들을 어느 정도 어떻게 다루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분하시면서 말씀과 행동과 생활로 메시지를 전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의 질서가 이 세상 나라에 침투해서 세상의 질서를 변화사키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신 것이다. 가령 형제와 재산을 나누게 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은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는 말씀을 하시는 방식으로 재산분배라는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셨다. 노예제도라는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노예를 형제처럼 대하라’ ‘상관을 주님처럼 대하라’는 식으로 다루었다. 예수님과 바울이 사회적인 이슈를 다룰 때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복음화와 사회 변화의 시각에서 다루었다.

예수님과 바울은 기독교의 정체성과 복음화와 사회 변화의 사명 면에서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신 것이다. 좌우 이념의 충돌이 있는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정체성과 복음화와 사회 변화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상생 공동체 발전에 협력하는 길은 무엇인가?

성경은 어떤 특정한 이념과 제도만을 고집하지 않고, 어떤 제도 하에서든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나눔과 섬김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문제는 어느 이념과 제도가 창조 질서 면에서 정의와 평화의 국가 공동체를 발전시키는데 가장 적합한가 하는 것이다. 어느 이념이 절대적으로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이념이 상대적으로 적합하냐의 문제이다.

이 문제 대해서 이념의 스펙트럼이 이념의 적합성을 고려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자유와 성장을 상대적으로 강조하고, 평등과 분배를 상대적으로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이념의 스펙트럼(spectrum)이 형성되어 있다. 극좌와 극우가 있고 중도가 있고 중도 좌와 중도 우가 있고, 그 사이에 다양한 이념적 입장의 스펙트럼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극좌는 김정일식 북한 공산주의 이념을 절대가치로 숭상하고 북한 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입장이다. 극우는 ‘빨갱이 잡아라. 우리나라에 빨갱이가 몇 백 만 명이 있다. 우리나라는 빨갱이 천국이 되어 가고 있다.’는 입장이다. 극좌와 극우 사이에 여러 이념적 입장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양한 입장들로 구성된 이념의 스펙트럼을 보면서 설교자는 어떤 입장을 선택하고 어떤 입장들과 상생하고 교제해야 하는가? 사회주의의 강조점인 프락시스(praxis)에 있어서 김일 공산집단이 기근과 압박으로 자국민 수백 만 명을 죽게 하고도 김정일과 일부 공산당원들만 호의호식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극좌를 따라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이 다양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극우도 국론분열을 촉진하고 상생과 교제를 깬다는 점에서 적합하지 않다.

극좌와 극우 사이에 중도를 중심으로 세금을 좀 더 거두자, 좀 덜 거두자는 식의 논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중도를 중심으로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조금씩 치우치는 입장들은 서로 논의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조정하면서 상생과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상생과 교제가 가능한 입장들 중에 어느 입장을 취하는 정당에 자유롭게 가담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최대한 구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설교자의 입장에서 설교 시간에 ‘좌파 정권’ ‘우파 정권’을 운운하는 것은 이념적 입장을 달리하는 교인들을 소외시키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설교자가 어느 정당의 이념을 대변하는 것 같은 발언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자국민을 압박과 사망으로 몰고 가는 북한식 공산주의의 침투로 정체성 상실의 위기와 국가 존립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회자가 입을 다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짖지 못하는 경비견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가 정의와 평화를 상실하고 불의와 압박을 일삼는 제도로 넘어갈 위험에 대해서 목회자는 언제든지 경고하고 교인들의 의식을 바르게 깨우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북한을 돕는 문제에 있어서도 북한 정권이 핵 개발을 하고 인권 탄압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정의와 평화를 깨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북한을 도울 때는 북한 정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을 돕는 것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억압과 기근에 몰려 고통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최대한 지혜롭게 도와야 한다. 교회는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그들을 탄압하지 못하도록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설교자는 이런 식의 설교를 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6. 하이-터치 설교

후현대주의의 한 특징은 감성 분출이다. 현대주의 시대에는 지성이 두드러졌고 후현대주의 시대에는 감성이 두드러진다. 감성이 두드러지는 후현대주의 시대에 청중은 갈등과 고민과 대립과 충돌 등 온갖 문제로 인격이 망가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고 있다.

지금도 이런 상황이지만 앞으로는 이런 상황이 더 심해질 것이다. 감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상처를 많이 받는 청중을 상대하는 설교자는 지정의 중에 감성 터치를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생활 속에서 손에 잡히는 진리(Hands-on-Truth)를 전해야 함과 동시에 감성을 깊이 터치해 주는(High-on-Touch)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자는 진리 면에서도 HOT, 감성 면에서도 HOT 설교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설교자가 감성 터지를 한다고 할 때 진리가 없는 감성 터치를 하면 안 된다. 진리가 없이 감성 터치만 하면 그것은 공허한 설교가 된다. 공허한 설교는 청중의 영성과 인격과 생활을 공허하게 해서 가뜩이나 상처가 많은 청중에게 더 많은 상처를 준다. 청중은 진리가 없이 실컷 울고 웃는 설교를 들어서 감성이 자극될 때 마치 치유와 회복을 체험한 것처럼 착각을 하지만, 사실은 상처가 덧나고 고름이 더 많이 고이게 된다. 설교자는 반드시 진리를 겸한 하이-터치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자가 진리에 관한한 차가운 얼음과 같고 감성에 관한한 뜨거운 불과 같은 설교를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불-과-얼음’(fire-and-ice) 설교를 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진리이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밝혀 주면 바른 진리를 전달하게 된다. 성경과 함께, 성경을 통해서, 성경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설교자가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설교를 하면 진리에 근거한 하이-터치 설교를 할 수 있다. 설교자가 성경을 해설해서 성령으로 변화시키는 설교를 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하이-터치 설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7. 흥미 유흥 설교

지금 우리나라에는 흥미 중심의 유흥 설교가 소위 설교 스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스타 설교자는 TV와 인터넷을 타고 자타에 의해 영웅이 되어 가고 있다. 비속어와 욕설과 반말, 망가지는 몸짓 등을 통해서 수많은 교인들로부터 인기의 스포트라이트(spotlight)를 받고 있다. 대형집회와 연합집회의 경우 스타 설교자를 세우지 않으면 교인들이 모이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의식을 가진 사람들도 그런 설교자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세우고 있다.

갈등과 상처가 점점 더 많아지는 세상에서 TV와 인터넷과 각종 매체가 흥미와 유흥 위주의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유흥 설교는 더욱 더 많이 나타날 것이다. 흥미 위주의 유흥 설교에 한 동안 매료되었다가 공허함을 느끼고 그런 설교를 외면하는 분위기도 나타나겠지만, 계속 유흥 설교를 따라가는 분위기도 형성될 것이다.

진리가 없거나 진리가 묽은 유흥 설교는 청중의 영혼으로 기갈과 기근을 만나게 한다. 많이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공복감에 시달리게 한다. 공복감 때문에 더욱 더 유흥 메시지를 찾게 되고 유흥 메시지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공허해지게 될 것이다. 마치 마약을 하면 할수록 마약을 더 찾는 마약 중독처럼 유흥 설교 중독에 걸리게 될 것이다.

메스미디어를 통해서 급속도로 번져나는 유흥 설교 중독증은 마약 중독증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처럼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유흥 설교 중독자들은 중독에 걸린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은혜’를 받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착각 때문에 유흥 설교 ‘설교자 누구누구의 설교가 참 좋더라.’는 말을 퍼뜨리면서 유흥 설교 중독이 전염병처럼 번질 것이다.

흥미 위주의 유흥을 추구하는 시대에 설교자는 ‘재미있는 교육’(edutainment)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양분이 많은 진리를 설교하되 적절한 유머를 활용해야 한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이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은 우리가 복을 받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경박해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유머를 활용해서 진리를 전하는 것은 후현대의 물결 속에서 가라앉지(sink) 않고 수영하는(swim) 방법이다.

8. 청중 취향 설교

지금은 소비자가 왕이라는 시대이다. 생산자가 소비자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생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대량생산보다는 소비자 각자의 취향에 따른 맞춤 생산이 히트를 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설교에 있어서 소비자는 청중이다. 청중을 무시하고 설교자 중심으로 설교할 수는 없다. 설교자는 청중을 바로 알고 청중에 맞는 설교를 해야 한다. 요즈음 설교자들은 청중 분석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영성과 감성과 체험을 중시하는 후현대주의시대의 청중의 취향을 고려해서 설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현상이 더욱 더 심해질 것이다. 더군다나 교인들은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회를 쉽게 옮기고 있다. 교인들은 사욕을 충족시켜 주는 설교자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교통이 편리해서 유동성이 강한 시대에 설교자가 청중의 취향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도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을 잘 아시고 그녀에게 맞는 방식으로 말씀을 전하셨다. ‘물 좀 달라’는 말씀과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을 전하시면서 자신은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제공하는 메시아이고 영생의 생수라는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의 취향을 중시하고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청중의 사욕을 충족시켜 주는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 청중이 가려운 귀를 긁어줄 설교자를 찾는다고 해도 설교자는 청중의 귀를 긁어주는 설교를 할 것이 아니라 청중의 영혼을 치료해 주는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자는 청중의 상황을 고려하면서도 청중의 관심과 욕구를 초월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 물 길러 온 여인에게 물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영생의 생수를 전해주셨던 예수님처럼 설교해야 하는 것이다.

9. 다양 퓨전 설교

지금은 퓨전 시대이다. 학문도 학문과 학문의 퓨전(multi-disciplinary)이 일어나고 있다. 성경해석학을 전공해도 언어학과 문학과 역사학과 사회학과 신학과 철학을 무시할 수가 없다. 문맥을 살리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언어학과 문학을 알아야 하고, 사맥을 살리기 위해서는 역사학과 사회학을 알아야 하고, 경맥을 살리기 위해서는 신학과 철학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학문만이 아니라 음식도 퓨전, 패션도 퓨전, 문학 장르도 퓨전--퓨전이 유행어가 될 정도가 되었다.

이런 흐름에 걸맞게 지금 구설교학에 따른 명제 설교와 신설교학에 따른 이야기 설교가 적절하게 혼합된 퓨전 설교가 유행하고 있다. 핵심명제를 전달하면서도 이야기들을 가미해서 전달하는 시대가 되었다. 단순히 이야기 설교만 하기에는 설교자도 설교 준비에 한계가 있고 청중도 듣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명제 설교에 길들여진 청중이 이야기 중심의 설교를 계속 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명제 설교와 이야기 설교의 퓨전이 앞으로도 계속 유행하게 될 것이다.

명제와 이야기의 퓨전만이 아니라 귀납과 연역의 퓨전, 감성과 이성의 퓨전, 언어와 영상의 퓨전, 예화와 동영상의 퓨전 등 다방면에서 다양한 퓨전 설교가 나타날 것이다. 청중의 관심이 다양하고 전문분야가 점점 더 세분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가 퓨전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명제 설교만 고집하는 설교자도 서론도 다양하게, 본론의 대지도 다양하게, 설교의 방식도 다양하게 설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같은 교회에서 장기간 머무는 설교자는 같은 청중을 식상하게 할 가능성이 많다. 설교자가 청중을 식상하게 하지 않고 그래도 참신하게 설교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10. 성령 강해 설교

내가 곧 출간할 <성령 설교>에서 ‘성령 강해 설교’를 주장하겠지만, 강해설교를 아무리 잘 해도 성령의 능력으로 하지 않으면 청중을 변화시킬 수 없다. 본래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으로 설교해야 성경의 생명력이 살아난다. 설교자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살전 1:5)으로 설교해야 설교를 통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깊은 강해설교’를 해도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청중은 공허감을 느낀다. 신설교학이 성경 본문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강해설교가 성경 본문을 강조하여 살리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강해설교를 잘 한다고 해서 청중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변화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강해설교자가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가 하는 강해설교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 설교자들 중에는 성경 본문만 강조하는 설교자들이 있다. 성령의 능력만 강조하는 설교자도 있다. 전자는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되 기도의 무릎은 매우 약하다. 후자는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다. 성령의 감동만 받으면 강단에 올라가서 바로 능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기도를 많이 할 때 성령이 강력한 즉흥적인 감동을 주셔서 설교하게 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에만 의존하여 성경을 연구하지 않고 설교를 준비하지 않는 것은 성경과 성령을 오해한 것이다. 성령은 설교자의 나태를 조장하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은 나태한 설교자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기도하는 설교자에게 강하게 역사하신다.

우리는 성경도 강조하고 성령도 강조하는 균형을 잡아야 한다. 성경 쪽으로만 치우치거나 성령 쪽으로만 치우치면 안 된다. 성경 쪽으로만 치우치는 설교자는 냉랭하고, 성령 쪽으로만 치우치는 설교자는 얄팍하다. 우리는 성경을 풀어서 성령으로 변화시키는 ‘성령 강해설교’, 짧게 표현해서 ‘성령 설교’를 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사역자들은 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사람들이다. 모세와 다윗과 선지자들이 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했던 사람들이다. 신약의 사도들과 사역자들도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했다. 예수님은 특별히 성령이 한량없이 충만하셨던 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하셨다(요 3:34).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설교자들의 완벽한 모델이시다. 예수님은 ‘성령 강해설교자’이셨다.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성령 강해설교’를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성령 강해설교’를 해 보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변화가 많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복이 많이 임하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구동신교회에서 9년간 설교를 하면서 계속 ‘성령 강해설교’를 하고 있다. 나는 ‘성령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많이 체험하고 있다. 하나님이 외부적인 교세도 엄청 늘게 하셨지만, 교인들의 인격과 생활이 많이 변하게 하셨다. 성경(Bible)을 풀어서(Exposition) 성령(Spirit)으로 변화(Transformation) 시키는 설교, 영어 첫 글자만 따서 BEST 설교가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나는 ‘성령 설교’가 미래 한국교회 설교의 모델이 될 것으로 본다. 내가 하는 설교이기 때문에 그것이 모델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 사역자들이 한 설교이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설교이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서 한국교회 설교의 10대 트렌드를 밝혔다. 이야기식 설교, 성경 강해 설교, 성경 장르 설교, 생활 적용 설교, 사회 이슈 설교, 하이-터치 설교, 흥미 유흥 설교, 청중 취향 설교, 다양 퓨전 설교, 성경 강해 설교.

설교자는 성경을 풀어서 성령으로 변화시키는 ‘성령 강해 설교’, 약칭 ‘성령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성령 설교’를 하되 설화와 서신을 포함한 성경의 다양한 장르를 살리는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성경 자체가 생활의 책이니 만큼 생활 속으로 가져갈 수 있는 적용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인 이슈를 무시하지 말고 기독교의 정체성과 복음화와 사회 변화의 관점에서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후현대주의 시대는 감성의 시대이므로 진리에 근거한 하이-터치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즐기기를 좋아하는 쾌락주의 시대에 설교자는 재미있게 진리를 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청중의 취향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청중의 ‘체감 필요’와 ‘실질 필요’를 다 충족시키는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다양성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단세포적 설교를 지양하고 다양한 퓨전 설교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성령 설교’를 하되, 진리도 뜨겁고(Hands-on-Truth), 터치도 뜨거운(High-on-Touch) 설교, 즉 HOT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예수님처럼 생활과 진리를 연결시키는 비유 설교(parable preaching) 혹은 은유 설교(metaphor preaching)를 개발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강단의 미래; 논쟁적, 변증적 설교에서 복음적 설교에로

발제: 허도화 교수(Ph. D. 계명대학)

논평: 이철승 교수(Ph. D. 대신대학)

발제자: 허도화 교수

서울신학대학교(Th.B.; M.Div.)

연세대학교(Th.M.)

Western Evangelical Seminary(M.A.)

Drew University(S.T.M.; M.Phil.; Ph.D.)

현재, 계명대학교 예배학/설교학 교수; 대학교회 담임목사

논평자: 이철승 교수

총신대학 (B.A.)

연세대학교 대학원 (M.Ed.)

총신대 신학대학원 (M.Div.)

남아공 University of Pretoria (Ph.D.)

현, 대신대학교 학생처장 및 실천신학 교수

현, 내일교회 교육목사

한국교회 강단의 미래; 논쟁적, 변증적 설교에서 복음적 설교에로

발제: 허도화 교수(Ph. D. 계명대학)

1. 서론

이 연구는 미래의 한국교회를 지탱해 갈 수 있는 설교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한국교회 강단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신학적 성찰로부터 출발한다. 역사적으로 한국교회의 설교사역을 비교할 때, 과거보다 현재에 설교하기 더 어렵다. 그리고 현재보다 미래에 설교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 설교의 미래가 있다면 어떤 형식을 취할 것인가?

흔히들 한국교회 강단의 미래 또는 갱신을 생각할 때, 먼저 새로운 설교 형식을 위해 현재 무엇이 새로워져야 할 것인지를 질문한다. 만일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설교 형식이 어떻게 나타날지 또는 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현재 우리의 설교를 어떻게 갱신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먼저 현재 점진적으로 우리의 설교와 청중을 형성하고 있는 몇 가지 서론적인 관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 서론적 관찰은 한국교회 강단의 역사를 구설교학시대(과거), 신설교학시대(현재), 그리고 미래시대로 구분하고 각 시대의 설교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들로 접근한다: 한국교회 강단이 도전을 받은 각 시대의 청중의 문화적 상황은 무엇인가? 그 상황에 대한 설교자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설교자들이 대안으로 제시한 설교형식에 대한 설교신학적 비판은 무엇인가?

첫째로, 각 시대의 설교에 대해 도전을 준 청중의 문화적 상황을 다룬다. 한국교회 설교의 특징을 비교하고 분석하기 위한 적절한 접근 방법은 각 시대마다 형성되고 있던 설교 상황을 규정짓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로, 복음과 문화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설교를 통해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의 설교는 특정한 문화적 상황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 말은 설교가 우선적으로 복음의 본질에 의해 영향을 받아야 하지만, 문화적 상황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설교가 언제나 청중의 특정한 문화적 상황을 전제하고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선포되는 이유는 청중이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메시지), 설교자, 청중(문화), 성령 등 설교사역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들 가운데, 설교는 무엇보다 설교자와 청중 또는 청중이 처한 상황과 밀접한 상호 관계가 있다.

둘째로, 청중의 문화적 상황으로부터 나온 도전에 대해 설교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다룬다.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역사적으로 복음과 청중의 문화적 상황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대표적인 설교형식들--논쟁적(Argumentative), 변증적(Apologetic Preaching), 그리고 복음적(Evangelistic) 설교--을 중심으로 비교한다. 이것은 그 상호작용에 대한 대화식 접근방식으로부터 강단의 새로운 설교방법들이 태동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각 시대의 설교형식에 대해 설교신학적으로 비판한다. 설교신학이 각 시대마다 설교자들로 하여금 기독교적인 의식을 형성시키는 설교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비전을 갖도록 도전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신학적인 성찰을 통해 갱신되고 발전될 수 있다. 신학은 강단으로 하여금 새로운 환경과 문제들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신학은 설교가 청중의 문화나 변화하는 문제들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도록 하며 새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물어볼 것을 요구한다.

2. 한국교회 강단의 과거: 개종자들을 위한 논쟁적 설교

논쟁적 설교(Argumentative Preaching)는 설교자가 성경 본문으로부터 찾은 중심사상이나 개념을 청중에게 설득하기 위해 취하는 논리와 명제 위주의 설교형식을 말한다. 흔히 전통적인 설교로 알려진 논쟁적 설교는 먼저 설교자에 의해 논증되어야 하는 명제나 전달하기 원하는 요점들이 규칙적으로 구성된 설교형식으로 논쟁적 성격을 취한다. 이런 논쟁적 설교는 1세기의 유대교적 토양 위에서 내러티브 설교에 의해 황금시기를 누리던 교회가 2세기에 헬레니즘 토양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으로 대치되면서 기독교의 전통적인 설교형식으로 나타났다. 논쟁적 형식을 띤 현대 설교들로는 3대지(three points), 교리, 그리고 교육적 설교 등이 있다.

1) 청중의 문화적 상황

최초의 한국인 예배공동체가 1879년 만주에서 형성되어 한국의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확대되었지만, 1884년 이후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도착하여 설교를 하기 전까지는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인 영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짧은 기간에도 한국에서 기독교가 급성장하여 대표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서든 한국인 설교자들에 의해서든 개종자들을 얻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설교사역의 핵심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교회 설교에 대한 이해는 초기 한국의 청중과 그들의 전통 종교들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이것은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가 한국의 문화적 관점으로부터 접근했음을 전제함과 동시에 그 이해와 평가 역시 문화라는 고지를 통해 평가되고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는 샤머니즘, 불교, 유교가 종교적, 문화적으로 통합된 청중의 상황을 통해 형성되고 전달되어 왔다. 이런 점에서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는 한국의 문화와 종교가 통합된 전통들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과거 한국교회의 설교에 대한 이해는 그 당시 한국인 회중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한국인의 공통적인 역사와 문화 속에 나타난 초기 설교자들과 그들의 메시지를 받는 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비록 텔레비전 방송실에서 설교하는 자라도 자신의 방송을 시청하는 회중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기를 원하듯, 설교는 설교자가 자신의 회중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한다. 회중의 교육, 직업, 경제의 배경뿐 아니라 그들의 기본적인 신앙의 방향까지도 아는 것은 설교를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청중의 교육이나 경제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특별히 한국인 회중의 민족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한국적 설교가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한국인들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민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민족성은 종종 한 개인의 교육이나 경제 배경보다 한국적 회중의 사고와 행동을 이해하는데 매우 기초적이며 근본적인 요소이다.

선교초기 한국인에 대한 이해는 한국교회의 설교방향에 대한 이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초기 한국교회 설교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들로 세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초기 한국교회의 강단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종교들로부터 개종자들을 얻어야 하는 선교 상황에 직면했다. 설교가 초기 한국교회 안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기독교가 한국에 상륙하기 이전 수세기 동안 한국에서 번성하였던 샤머니즘, 불교, 유교와 같은 전통적인 종교의 토양이 준비되어 있던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설교자들은 청중의 삶에 복음의 실존적 의미를 제공하기 위해 상황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무교, 불교, 유교의 전통에서 배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배타성은 한국인 역사와 문화의 모든 분야에 젖어있는 샤머니즘, 불교, 유교와 같은 다른 신앙을 거절하였다. 이 과정에서 설교는 개종자들을 얻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타종교와의 차별성과 우위성을 논증하는 비타협적 선교설교 또는 교리설교가 되었다.

둘째로,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방향은 초기 선교사들의 가르침에 기초되었다. 선교사들은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한국교회들에게 정통주의로 여겨진다. 그들의 교육은 금주, 금연, 또는 춤 놀이 금지 등과 같은 청교도 윤리를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참 기독교인은 중생(born again)의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세상의 악에 빠진 자들의 영혼을 구하는데 강한 강조를 두었다. 이런 청중의 문화적 상황은 설득적인 교육설교와 윤리설교가 주요 설교형식으로 자리를 잡게 만들었다.

셋째로,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의 방향은 나라 안과 밖에서 일어났던 역사, 정치, 사회의 안정이 계속 위협을 받는 것으로부터 안보와 보호를 제공하는 역할에 맞춰졌다. 특별히 한국은 30년 이상을 일본의 치하로부터 자유하려고 싸웠다. 한국이 1945년 일본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남과 북으로 나누어 졌다. 5년 후에 한국동란이 일어나 무수한 인명을 취하고, 재산 파괴 등, 하나의 민족이었던 신뢰가 무너졌다. 한국인의 정신적 문화적 전통들이 일본의 지배와 북쪽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남쪽의 자본주의적 물질주의에 의해 무너졌다. 이런 사회적 정치적 불안의 연속은 내세적이며 기적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를 추구하는 무비평적인 알레고리 설교를 양산했다.

이와 같이 초기 한국교회의 강단은 타종교와의 대결, 청교도식 신학교육, 그리고 불안한 사회 등의 상황으로부터 성숙한 설교와 신학에 대한 관점을 발전시키거나 초기 선교사들이 전달해준 배타적이며 근본주의적 신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평화롭거나 안전한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교회의 설교의 방향은 지금도 대다수의 교회 강단들을 통해 아직도 보수적이며 복음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논리적인 구조를 기초로 하는 교리설교, 교육설교, 그리고 3대지 설교 등으로 나타났다.

2) 설교자들의 반응

한국에서 개종자들을 얻기 위한 초기의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그들의 역사와 문화의 모든 분야에 젖어있는 샤머니즘, 불교, 유교와 같은 다른 신앙을 거절하도록 기독교 신앙의 배타성을 강조하는 논쟁적 설교이었다. 설교자의 임무는 청중의 실제상황에 적응 가능한 기독교의 신앙을 실천하도록 강조하는 설득적 설교이었다. 이런 이성적 설득 방식의 설교가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설교로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있다.

첫째로, 이성적 설득 방식이 텔레비전과 같은 청각적인 것보다는 출판과 신문과 같은 인쇄지면 문화의 시각적인 사고방식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성적인 설득 방식이 진리를 계몽주의 정신에 잘 어울리도록 고정시켜 전달하는 설교와 잘 맞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성적 설득 방식을 전통적인 설교방법으로 가장 고정시킨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때문이었다. 설교자들은 설교의 내용을 위해서는 성경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설교의 형식과 방법을 위해서는 수사학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선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설교학과 강단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설교 형식은 어거스틴이 교회에 가르친 설득을 위한 논쟁적 설교이다. 그가 설교에 적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청중의 생각(무엇이 메시지인가?), 마음(어떻게 그 메시지가 내 삶에 영향을 주는가?), 그리고 의지(무엇을 내가 행해야 하는가?)에 호소하기 위한 이성적인 논증 방식을 취한다. 19세기 후반 John Broadus는 자신의 책, 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s에서 이 고대의 설득 형식을 설교의 수사학적 구조로 발전시켰다: 메시지는 무엇인가?(What is it?) 그 메시지의 가치는 무엇인가?(What is its worth?) 그 메시지를 어떻게 얻는가?(How do I get?) 이렇게 청중의 지정의에 호소하는 설교는 점차 성경 본문과 주제가 무엇이든 3대지(three points)에 의해 지지를 받는 전통적인 설교로 자리를 잡았다.

성경 본문으로부터 나온 설교의 내용보다 설교의 형식과 방법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논쟁적 설교는 청중의 질문들에 대한 이성적 대답을 제시하는 설득의 과정을 밟는다. 설교자는 성경본문에서 청중이 던지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1) 이 성경 구절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설명) 2) 그 구절이 말하는 것이 사실인가?(증명) 3) 그 구절이 말하는 고대의 문화들이 오늘 우리의 문화와 상관이 있겠는가?(관련) 4) 그 구절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적용) 이와 같이 설교자가 논증해야 할 명제나 전달하고 싶은 요점 목록들로 구성된 설교는 청중에 의해 예측 가능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제시함으로 진행된다. 설교자는 성경본문이 행하고자 하는 바를 허락하기보다 자신이 추출한 명제를 설득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3) 설교신학적 비판

과거의 논쟁적 설교는 기독교적인 의식과 삶을 형성시키는 신학적인 요소들보다 수사학적인 것들에 더욱 의존해 왔다. 논쟁적 설교는 오랜 기간 한국교회 안에 권위적 설교자와 수동적 청중, 그리고 개념적 설교를 양산했다. 설교자들의 설교습관을 지나치게 권위적으로, 그리고 청중의 의식을 수동적으로 형성시켰다. 설교자는 자신의 주장과 주제를 논증하기 위해 성경의 구절로부터 기본적인 아이디어나 명제를 추출하는 기초공사에만 치중하는 이성적 설교습관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청중은 학교강의의 연장과 같이 이성적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적 설교에만 익숙해져 감성적이고 의지적인 면에서 결핍 증세를 나타냈다.

논쟁적 설교는 한국교회와 사회 안에 다양한 신앙적 병리 현상들을 촉진시켰다. 그런 종류의 설교는 나눔과 섬김의 복음을 샤머니즘에 기울어진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축복들로 왜곡하고 대체하여 한국교회들을 다른 사회적 그룹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도록 만들었다. 또 다른 병리 현상은 즉시성과 내세에로의 도피와 관련이 있다. 이런 현상은 특별히 샤머니즘의 특징들이 현대 물질주의와 카리스마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초기 설교자들의 샤머니즘적 경향으로 집중되면서 즉시적이며 가시적인 축복들을 향한 교인들의 요구 때문에 일어났다. 이런 경향은 복음을 진지하게 취급해야 할 설교자들과 교인들 모두를 눈멀게 했다. 설교자들의 마음과 생각이 자신들 주위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압제 받는 자들의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물질적, 개인주의적, 그리고 이 세상적 축복에 치우치는 경향에 중독되었다.

이정용은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설교의 병리현상들을 7가지로 정리하며 비판하였다: 1) 무비평적 주석과 비타협적 교리 중심의 설교, 2) 성령의 증거에 대한 강조, 3) 회심과 절대적 헌신 강조, 4) 한국인의 컨텍스트, 고난과 민족주의에 대한 평가, 5) 이 세상의 축복과 다른 세상(하늘)의 보상 강조, 6) 풍성한 문화적 상상, 이야기, 상징, 격언 사용, 그리고 7)매너리즘과 억양 사용.

하지만 과거의 논쟁적 설교가 한국교회 안팎에 부정적 영향만 남긴 것은 아니다. 한국 교회들이 샤머니즘, 불교, 그리고 유교의 종교적 전통과 그것들에 의해 형성된 문화적 전통 때문에 세계 어떤 다른 교회들보다 빠르게 성장한 요인으로 한국교회의 독특한 설교를 빼놓을 수 없다. 아울러 새벽기도회, 성경공부에 대한 열정, 노인에 대한 존경과 같은 이런 한국의 문화적 종교적 유산들은 한국교회의 설교를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주요 현상인 다원적, 다문화적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잠재성을 부여했다.

그러면 과거 한국교회의 논쟁적 설교가 다원적, 다문화적, 다윤리적 사회라는 청중의 새로운 상황에 대해 창조적으로 접근할 설교형식은 무엇인가? 첫째로, 한국인 설교는 설교자가 자신의 성도들의 상황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한다는 의미에서 설교자의 전인적 역할에 기초해야 한다. 이것은 권위적인 설교자에게 그리스도인의 매일 삶에서 예언적 증언을 포함하는 통전적 복음을 설교할 필요를 요구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설교자와 회중이 예배에서 중심적인 설교 행위 주위에 연합되는 방식으로 설교자의 실제 삶의 이야기들이 본문과 회중과 함께 엮어져야 한다. 그 당연한 결과는 한국의 설교가 교리적, 연역적 접근으로부터 귀납적이며 상황적인 접근방식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논쟁적 설교에게 요구되는 또 다른 변화는 역사적인 주석 방법들에 비추어 본문을 성실하게 해석하는 것과 관련된다.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의 설교는 알레고리 해석에 의해 지배당해 왔다.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와 사회 모두에 대해 헌신하기 위해 주석적 방법과 함께 내러티브 방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의 설교사역은 세계 기독교의 증언에 직접 참여하는 것과 다름없다. 성경에 대한 성실한 해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살 수 있다.

한국교회가 알레고리 해석과 연역적 전개로 인한 논쟁적 설교에 의해 지나치게 지배되어 온 문제들을 인정하면서, 최근의 한국 설교자들과 설교학자들은 현대 회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연역적 움직임으로부터 귀납적 움직임 방법으로 설교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제시했다. 이런 변화들은 과거 한국교회의 설교 형식들이 주로 하나님의 말씀 신학보다 오히려 수사학적인 것에 기초되어 있었으며, 그래서 설교의 효율성에 한계가 있었음을 암시한 것이다. 연역적 접근이 갖는 문제는 다양한 삶의 정황에도 불구하고 성경 본문의 보편적 타당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접근방법은 오랜 기간 성경 본문과 청중의 삶의 실체 사이에 깊은 간격을 만들었다. 설교에서 이 접근방법은 청중이 살고 있는 그들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사회적 조건들로부터도 그들을 격리시킨 결과를 낳았다. 설교자와 청중 모두를 위한 한국교회 초기의 설교는 점차 연역적이며 제안적인 접근으로 머리에 집중하는 논쟁적 설교로부터 귀납적이고 문맥적인 접근으로 가슴에 집중하는 변증적 설교에로 변해야 한다.

3. 한국교회 강단의 현재: 성경에 익숙한 사람들을 위한 변증적 설교

변증적 설교(Apologetic Preaching)란 하나님을 위해 기독교의 신앙의 근거나 복음의 실체를 올바르게 변증하는 역할을 하는 설교를 말한다. 베드로가 흩어져 있는 독자들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벧전 3:5).”고 권면한 것처럼, 변증적 설교는 다양한 변화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선포하는 설교로 여기에 귀납적 설교와 내러티브 설교가 속한다.

변증적 설교는 최근에 새로운 설교학 운동(New Homiletics)이 소비자 중심 시대에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교회로 오는 청중을 배려하여 제시한 설교형식이다. 변증적 설교자는 청중이 자신들의 경험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을 거부하기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설교자는 자신도 청중과 동일한 경험을 했다고 말하고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접근한다. 그러므로 변증적 설교자들은 청중이 이미 잘 이해하고 있는 경험에 맞추어 복음의 언어를 해석하고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찾는다. 이런 의미에서 Paul Tillich의 고백처럼, 설교자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경험을 다른 언어로 표현해야 할 상황에서 “변증적 형식의 설교”(apologetic type sermon)를 발전시켰다.

1) 청중의 문화적 상황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들로 알려진 기술 폭발, 커뮤니케이션 혁명, 과학적 낙관론의 쇠퇴, 그리고 계몽주의 이후 형성된 지적, 정신적 체계의 붕괴 등, 급격한 문화 사회적인 변화가 설교 현장의 상황변화에로 나타났다. 이 전반적인 문화 사회적 붕괴는 교회 안에 교인들의 감소와 교회의 역할의 위축 등 많은 증후군들을 경험하게 하면서 설교에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였다. 한국교회의 강단도 이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먼저 설교현장에 위기를 불러온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변화이었다. 텔레비전의 영향력에 의해 형성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사람들은 논리적인 설교에 익숙하지도 적응하지도 못한다. 전통적인 설교의 선적인 논증은 설교에 대한 친밀함을 상실하였다. 설교자는 최대한 청중에게 관심을 끄는 분위기를 창조하여 의사소통의 채널을 돌리지 않도록 할 설교를 만들어야 했다. 엔터테인먼트 시장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아 청중의 기대를 충족시킬 설교 방법론을 찾아야 했다. 그 노력의 결과, 내러티브 설교가 지루하고 딱딱한 논쟁적 설교에 인내심을 잃은 청중에게 그리고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설교에 조급한 청중에게 매력적인 대안이 되었다.

더구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기독교에 관한 정보들이 넘쳐나고 있다. 설교자는 이미 복음을 들어본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설교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문화에서 살고 있는 청중은 이미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기독교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매주 많은 설교들을 듣고 있는 동일한 사람들에게 완전히 새롭게 처음 듣는 설교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설교를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는 한편의 설교가 좋은 소식(Good News)이 될 것이지만, 이미 들어 본 사람들에게는 생명력을 잃은 반복과 예측 가능한 설교가 될 것이다. 생동감과 독창성에 큰 가치를 두는 문화에서 반복과 예측 가능한 설교는 지루함의 원인이 된다.

과거 오랜 기간 전통적인 설교로 군림해 오던 논쟁적 설교가 변화되기 시작한 것은 청중의 문화적 상황이 변화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설교자의 임무는 더 이상 이성적 설득을 통해 중심 아이디어를 청중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청중에게 미학적이며 감정적인 면을 포함하는 성경 본문의 역동성을 경험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에 설교자는 설교를 만들고 전하는 과정 속에 청중을 초대하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한편으로, 청중이 설교 과정 속에 참여하도록 초대를 받았다. 과거의 설교 과정에서 배제되고 권위적 설교 앞에서 수동적이던 청중이 새로운 문화적 상황에서는 설교자의 여정에 참여하여 그들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내도록 초대를 받기 시작했다. 이 초대는 설교자가 권위적인 의견에 저항하도록 교육을 받은 청중에게 민주적인 설교가 되도록 메시지의 형식을 조절하겠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 초대에는 청중이 설교 속에서 자신들의 실제적인 삶에서 경험되고 있는 구체적인 것들을 발견하도록 배려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청중이 성경의 내러티브를 경험하도록 초대를 받았다. 197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설교운동은 청중에게 민감하고 성경 장르에 일치하는 대안적 설교형식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이제는 설교자가 시나 비유, 내러티브 본문들을 간단한 개념들로 단순화시키지 않고 “그 성경본문이 의도하는 것을” 청중이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를 느꼈다.

2) 설교자들의 반응

신설교학 운동은 포스트 모던시대의 문화적 상황에서 의사소통하려는 설교자들에게 방향성을 제공하여 새로운 설교학 전통을 마련했다. 예측 가능한 설교 전개방법에 따른 청중의 지루함을 줄이고, 성경 본문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추출하는 대신 성경이 행하고자 하는 바를 행하도록 시도하면서 새로운 생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설교자들은 이런 청중의 새로운 문화적 상황에 대한 새로운 설교 방법으로 귀납적 설교와 내러티브 설교를 제시하였다.

신설교학이 전통적인 논쟁적 설교에 대한 대안적 설교형식으로 제일 먼저 제시한 것은 귀납적 설교였다. 귀납적 설교형식으로 어떤 설교자보다 먼저 전통적인 설교방식에 도전한 설교자는 Fred Craddock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체계와 권위적인 어조가 담긴 논쟁적 설교는 기독교가 흥왕하던 시기에나 통했지만 덜 권위적이며 자연스러운 의사전달 방식을 선호하는 현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설교자들이 귀납적 설교를 요점들의 지지를 받아 논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논쟁적 설교의 대안으로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에는 청중이 이미 기독교 전통에 익숙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 귀납적 설교는 변화된 청중을 위한 설교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재발견된 설교전개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Craddock도 귀납법이 사람들에게 이미 알려진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주장하였다.

귀납적 설교에서 청중은 자신의 결론을 도출하도록 유도를 받고, 또한 설교가 준비될 때 설교자가 이미 도달한 단계들에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차원에서 내러티브 특성과 연결된다. 내러티브의 특성을 지닌 귀납적 설교는 논쟁적이거나 권고적이기보다 묘사적이기에 설교에 통일성을 제공하고, 흥미를 유지시키고, 설교자로 동일한 청중과 함께 탐색 여정을 하도록 돕는다.

또한 내러티브 설교를 소개한 Eugene Lowry는 Craddock의 주장을 더 발전시켜서 본문의 형식을 따라 설교를 하되 플롯에 의해 극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설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어떤 것”을 곤경으로 제시하기 시작하여 그 해결을 향해 나아가는 일종의 플롯이다. 논쟁적인 설교가 단순한 직선으로 전개된다면, 내러티브 설교는 시작 부분의 곤경과 결말 부분의 해결 사이에서 곡선처럼 극적이며 발전적으로 진행된다.

신설교학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과거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적 상황에서 의사소통하려는 설교자들에게 새로운 방향성을 제공하였다. 그것은 전통적인 설교가 성경으로부터 하나의 아이디어나 의미를 추출하여 청중에게 설득하도록 하였다면, 새로운 형식의 설교는 청중을 설교의 중요한 요소로 재발견하였고, 성경 장르의 계시적 특성을 인식하였고, 그리고 내러티브의 움직임을 강조하여 포스트모던 시대에 적합한 설교방법을 제시하였다.

3) 설교신학적 비판

신설교학은 설교자가 기독교 신앙에 익숙한 청중을 대상으로 논쟁을 위한 학문적 강의 같은 설교와 토론의 장 같은 예배의식을 계속해야 하는 1950년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이었다. 신설교학 운동은 1960년대부터 전통적인 설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개선책을 논의하기 시작했으며 완성된 첫 작품이 바로 1970년 초에 등장한 귀납적 설교와 그 자매품인 내러티브설교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귀납적 전개방식과 내러티브 형식의 재발견의 단점들이 확인되고 미래의 강단을 지탱해갈 수 있는 설교방법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설교학의 단점 몇 가지가 새로운 청중의 문화적 상황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첫째로, 귀납적 설교는 기독교 신앙에 익숙하지 않은 청중에겐 효과적이지 못하다. Craddock은 귀납법이 청중으로 하여금 이미 잘 알려진 메시지를 이해하도록 돕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설교학이 태동한 지 3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성경의 내용과 기독교적 선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비기독교 문화의 가치관에 의해 성장하였다. 더구나 현재의 문화는 급속도로 탈기독교화되어 가고 있다. 크래독은 귀납적 설교가 청중에게 그들 자신의 결론을 도출하도록 유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귀납적 설교의 초점은 개인의 경험에 맞추어져 있다.

둘째로, 내러티브 설교는 개인적인 취향이 도덕적 판단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 청중의 문화적 상황에서는 공동체의 윤리적 비전을 형성하지 못한다. 설교는 다양한 윤리적 비전을 제시하는 내러티브를 성경 이야기 속에 통합시켜야 한다. 그런데 신설교학의 내러티브 설교만으로는 오늘날 세속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의 내러티브를 성경 이야기 속에 적합하도록 만들기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성경 이야기보다 그들 자신의 정체성 확립에 더 많은 영향을 주는 다양한 이야기(내러티브)들을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소비자 중심 자본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그리고 자기중심주의로 특징지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 가운데 있는 교회의 설교는 기독교 문화를 유지하고 회복해야 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셋째로, 신설교학은 설교의 테크닉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사역의 큰 신학적 의제인 설교의 목적을 상실케 하였다. 설교자가 내러티브 설교의 각 전개부분을 다룰 때 더 큰 플롯을 마음에 두어야 하지만, 설교의 경험적인 영역을 넘어 전체적인 설교사역의 목표와 전략을 물어보지 못한다. 매 주일 강단에서 전달되는 곤경(문제)에서 해결로 전개되는 플롯의 내러티브 설교들은 고정적인 청중에게 무엇인가 미해결된 것에서 시작하여 해답을 찾아 나아가는 텔레비전의 미니 시리즈 또는 에피소드 시리즈를 규칙적으로 시청하는 것같이 느껴진다. 이렇게 일정한 공식처럼 동일한 플롯을 따라 매 주 펼쳐지는 내러티브 설교는 매주 관객을 즐겁게 하려는 목적을 성취하려는 텔레비전 시리즈처럼 청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변증적 설교가 되어버린다. 이런 면에서 내러티브 설교가 청중에게 성경 본문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창출하려 하지만, 오히려 설교의 경험적인 영역 너머에 있는 전체적인 설교사역의 목표를 상실할 수 있다. 또한 내러티브 설교는 다양한 장르들로부터 설교를 구성하는 전통적인 설교를 일방적인 형식을 따르는 일방적인 설교로 대체했으며 이야기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 “인간의 삶과 신적 계시의 표현을 축소하거나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넷째로, 신설교학이 주장하는 내러티브 설교는 설교자를 “권위 없는 자”로 규정할 뿐 아니라 설교의 권위까지 상실하게 만든다. 권위 없는 설교자와 설교는 청중에게 그들의 삶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요구를 제시하는데 주저하게 된다. 청중의 삶에 변화를 요구하는 복음 설교는 결코 권위 없는 설교가 될 수 없다. 성경의 내러티브 전통은 청중에게 순종과 함께 그 내러티브에 응답하라는 부름의 기초가 된다.

신설교학을 대표하는 변증적 설교는 경험을 추구하는 시대의 청중을 위해 직접적인 복음으로 맞서기보다는 특별한 대체 전략을 내세웠다. 사람들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교회로 오는 청중의 문화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인간의 경험을 복음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변증적 설교의 전략은 매우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점차 강단이 청중을 잃어가는 위기의 때에 설교를 계속 최고의 자리로 지켜주기 위해, 신설교학은 복음과 동일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설교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이처럼 변증적 설교가 자신들의 경험에 대해 다른 사회 계층들의 설명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청중을 배려한 전략(설교방법론)을 계속 사용할 때, 결과적으로 설교자가 대부분의 설교가 빠질 수 있는 교묘한 타협 양식에 도전하지 못하고 굴복하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설교를 우리 안에서 이미 확립된 이해 관습에 맞추려고 노력하다가 청중과 타협한다. 그런 현상유지를 위한 설교는 기쁜 소식(복음)의 선포가 되자 못한다. 설교는 기독교의 모든 의식 가운데 우리의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가장 도전적인 사역이다.

4. 한국교회 강단의 미래: 낯선 이들을 위한 복음적 설교

복음적 설교(Evangelistic Preaching)는 시대와 대상에 따른 구별이 없이 설교의 필수적인 목적인 복음을 설교의 중심 내용으로 삼는 설교(Gospel Preaching)를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설교(Evangelical Preaching)와는 다르다. 복음적 설교는 비기독교적 문화에 속한 사람들을 “회심시키려는” 케리그마(Kerygma)의 기능을 지닌 선교적 설교(Missionary Preacing; 복음전도 설교)와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 회중을 “더 깊은 회심으로 이끌려는” 디다케(Didache)의 기능을 지닌 목회적 설교(Pastoral Preaching) 모두를 포함하는 통합적 기능을 지닌 미래형 설교형식을 말한다.

복음적 설교의 주된 이슈는 복음을 통한 회심이다. 기독교는 회심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삶의 방식이며 또한 익숙해지지 않으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삶에 대한 특별한 관점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강단은 복음전도의 대상인 사람들과 교회 안에 들어와 신앙교육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날카롭게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 만나는 청중이 기독교 유산에 의해 믿음이 굳게 형성된 사람에서부터 최저 수준에 걸쳐 있는 개종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포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중이 이런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상황 가운데 존재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청중의 문화적 상황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설교의 의미와 실제, 그리고 그 형식에 관한 기본적 이해에 대한 몇 가지 도전들이 새로운 상황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다. 최근에 한국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주된 도전들이 설교의 방향과 형식을 정하는데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 도전들은 모두 강단으로 하여금 설교의 중심 내용이며 동시에 설교의 기초와 방향을 제시하는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첫째로, 교회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은 최근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복음전도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신호이다. 사람들은 지역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지 못한 교회에 대해 등을 돌리고 적대적인 분위기를 쌓아가고 있다. 더욱 심각한 현상으로, 한국교회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거의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과 그들이 형성하고 있는 비기독교적 문화와 마주하고 있다.

둘째로, 교회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도전은 이미 복음을 들어본 사람들에게는 다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설교자에겐 기독교의 메시지를 기억함으로 형성된 공동체들 앞에 설 기회가 줄어들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들이 비기독교적 문화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까지도 기독교 신앙과 유행하는 심리학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섞은 많은 다른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비기독교적인 영역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관한 정보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미 복음을 들었을 지라도 비기독교 영역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주 새로운 설교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설교를 들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와 기독교의 메시지에 대해 낯선 이방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다 해도, 그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 없이 교회의 의자에 앉아 있게 된다. 그들에게 설교는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가는 느낌을 줄 것이다.

점점 더 복잡한 다원적, 다문화적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시대에 설교를 접하는 청중은 다양한 개인들의 복합체이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메시지에 친숙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이들은 성경 이야기를 잘 알지만, 다른 이들은 설교자가 기대하는 것보다 성경을 알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복음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지만, 다른 이들은 복음을 들었을 지라도 주의 깊게 듣지 않았을 것이다.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며 그들의 기억을 되살리지 않는다면 기독교 메시지를 잊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청중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을 뿐 아니라 구분할 수도 없다. 앞으로 하나의 회중에게 전한 설교라 할지라도 다양한 청중에게 설교를 한 것이 된다. 이런 면에서 앞으로는 보다 분명해지는 회중의 성격이 설교의 방향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처럼 두 부류의 청중으로 구성된 회중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기독교 대학의 채플 또는 대학교회이다. 기독교에로 회심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하나의 회중으로 섞여 있는 특별한 형태의 교회인 채플은 현대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미래형 교회를 암시한다. 비기독교적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두 부류의 청중에게 미래형 교회의 강단은 특별히 복음전도를 위해 세워진 채플과 같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교회 강단의 청중 대부분은 기독교 대학들의 채플에서 경험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의 설교에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들, “낯선 사람들”(strangers)이 될 것이다.

점차 교회의 설교 대부분은 낯선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진다. 미래의 청중은 두 가지 면에서 낯선 사람들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에 대해 공유할 것들이 부족한 낯선 사람들로 인식된다. 주로 대학생들과 여행자들 또는 방문자들로 구성되는 이 낯선 사람들은 기독교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종종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들을 수도 있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이 채플에 참석하는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는 자신들의 익명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가 동일한 종교적 전통이나 소속감을 공유하거나 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나그네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이처럼 점차 늘어나는 낯선 이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는 사역은 회중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낯선 이들에게 설교를 하는 사역은 과거처럼 교회를 유지해야 하는 전제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오히려 설교자에게 어느 정도 “복음을 설교할 자유”를 부여할 것이다. 이런 낯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최소한 서로간의 주장과 논쟁을 피하고 최대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미래의 청중은 종교적 주관이 강한 기독교 메시지에 대해 낯선 사람들로 남으려 한다. 그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협력을 성취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여기는 사회의 질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서로에게 낯선 이들로 남을 때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습관을 가지고 교회로 오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성경의 공동체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창조자로 나타나는 현대 내러티브를 선택한다. 그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선택한 내러티브는 어떻게 자신들이 하나님과 다른 이들에 의해 선택되었는지를 언급하지 않는다. 과거에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공동체적 순례자로 이해했지만, 지금 그들은 우연히 선택한 같은 버스(교회) 안의 단순한 여행자로 발견될 뿐이다.

2) 설교자들의 반응

모더니즘 시대를 위한 논쟁적 설교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위한 변증적 설교 이후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낯선 사람들에 대한 설교형식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메시지나 복음의 요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거나 이미 익숙한 회중들에게 어떻게 말씀을 전할 것인가? 개인적인 필요들을 충족시키려는 소비자로 교회에 나오는 청중을 어떻게 진실한 신앙공동체로 형성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새로운 설교의 기술이나 형식을 제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설교의 미래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설교사역 전체와 관련된 신학적 문제를 제안하려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 어느 때보다 복음에 대해 더 저항적인 이교사회와 대면하고 있다. 더구나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과거와는 다르게 세례에 의해서 뿐 아니라 다양한 조건들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되는 새로운 청중에게는 설교자가 복음을 통해 기독교의 이야기를 다시 전함으로 교회의 존재 근거를 계속 기억나게 해야 한다. 설교자는 다원주의 사회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 청중이 이미 개종되었거나 쉽게 변화될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복음을 설교하려는 것은 오직 비기독교세계를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이미 개종한 사람들에게도 복음 설교를 계속했던 것처럼 기독교인 회중에게도 그들의 존재의 근거가 되는 구원 사건을 정기적으로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미래의 청중인 낯선 사람들 앞에서 문화적인 언어로 복음을 경험하게 하려는 변증적 설교는 결코 기독교 설교사 가운데 최고의 영광을 누릴 수 없다. 오히려,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성례전 의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면, “설교는 변증론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화의 문제이다.” 설교는 우리의 삶을 우리가 선택한 성경의 내러티브에 의해 형성되도록 회심시키는 교회 사역의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문화의 내러티브에 의해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에게 설교는 이해나 경험보다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낯선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때 그 설교는 의사소통을 하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이해하고 있다는 가정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다. 설교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을 듣기에 충분한 조건이 된다는 가정에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청중이 선포되는 설교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이렇게 변화를 요구하는 설교를 낯선 사람들에게 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낯선 사람들이 복음을 통해 자신들의 삶이 왜 이해할 수 없는지를 발견하도록 돕기보다는, 오히려 지속적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축소적인 전략에 의해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은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많은 낯선 사람들이 기독교 공동체 밖으로부터 철저하게 비기독교적인 내러티브와 그 의미를 가지고 오기 때문에, 그들에게 전통적인 논쟁 형식의 설교는 어떤 의미도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논쟁적 설교는 기독교 이전 시대에 속해 복음과 문화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개종자들에게나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청중의 문화적 상황에서 발전된 변증적 설교도 근본적으로는 문제 해결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변증적인 설교는 기독교 이후 시대에 속해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청중에게나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 교회를 위한 통합적 청중의 특성을 지니는 낯선 사람들에게는 복음전도의 대상과 목회의 대상 모두에게 적절한 복음적 설교가 가장 적절하다.

복음적 설교는 복음에 충실한 설교이기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낯선 사람들을 환대하는 설교이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는 낯선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이 나타난다. 그들 중 얼마는 유대인들이고 다른 얼마는 이방인들이다. 그들이 낯선 사람들인 이유는 단순히 함께 나눌 회중이나 이야기, 전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먼저 낯선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낯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교한다는 것은 복음으로 그들을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그 다음 신앙공동체에로 연합되게 하는 것이다.

복음으로 낯선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의 신앙공동체로 연합시키는 복음적 설교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복음적 설교의 형식을 하나의 고정된 방식으로 표현하거나 축소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형 설교가 진행되고 있는 기독교 대학의 채플이나 대학교회에서 전달되는 설교들을 통해 어느 정도 공유되는 복음적 설교의 간단한 플롯을 제시할 수 있다.

복음적 설교는 먼저,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세상적인 것들에 의해 예속됨, 세계적인 불황, 욕망과 같은 공통적인 인간성을 지적함으로 시작된다. 왜냐하면 공통적인 인간성이 설교를 통해 인식될 때 낯선 사람들을 하나의 신앙공동체로 묶을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이런 공통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더 좋은 방법으로 복음을 제시함으로 기독교공동체를 형성하는 목표로 연결시킨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깨달음을 나누는 것으로 또는 변증적인 것으로 대체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믿음에 대한 응답과 복음에 합당한 행위를 요구하고 전체 교회의 행동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호소한다. 이런 점에서 복음적 설교의 목적이 개인의 변화뿐 아니라 공동체의 변화를 바라보기 때문에 항상 교회론적이다. 복음적 설교는 교회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 복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청중을 교회의 삶 속에 있는 새로운 상황들에로 데려다 준다.

3) 설교신학적 비판

수사학에 기초한 과거의 논쟁적 설교가 철학적인 주장(지식)과 설득을 중요하게 여기고, 다원적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설교운동이 제시한 변증적 내러티브 설교가 문학적인 감성과 경험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기독교 신앙과 교회를 존재케 하는 본질적인 복음에 초점을 맞추려는 복음적 설교는 신학적 성찰과 도전에 의한 삶의 변화를 중요하게 여긴다.

신설교학은 오늘날의 설교자는 복음(성경)보다 청중을 더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러티브 설교자들은 청중이 스스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교회로 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청중은 성경의 내러티브나 문화의 내러티브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습관에 빠져 있는 것뿐이다. 대부분의 청중은 복음을 듣기 위해 자신의 문화에 대한 충성심에 의문을 던지려 하지 않는다. 어느 시대, 어떤 상황, 어떤 종류의 청중이라도 복음을 들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 타협의 양식으로 양보되어서는 안 된다. 강단으로부터 복음이 설교되지 않고 들려지지 않는 것은 설교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강단의 정체성을 검증하는 비판적인 칼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적 설교는 신학적 성찰을 가지는 통합적 설교의 모델이다. 왜냐하면 어떤 설교라도 복음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적 설교가 없는 곳에서는 교회의 메시지가 하찮은 것으로 전락해 버린다. 또한 비판적인 신학적 성찰이 없이는 교회가 지배적인 이념을 위한 복음과 대중적 흥미를 일으키는 것들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어 청중이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신학적 설교가 강단 선포의 일관성을 유지시켜주기 때문이다. 이 선포의 일관성은 복음적 설교를 통해 현재의 교회가 과거와 미래에로 서로 연결되게 한다.

한편으로, 복음적 설교는 우리를 과거의 복음을 기억하며 되돌아가게 한다. 복음적 설교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또한 교회를 존재하게 하는 본질적인 복음에 초점을 맞추는 신학적 설교이기 때문에, 교회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교회의 주요 신앙고백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복음적 설교는 교회의 사명과 목표를 다수의 뜻보다 교회의 기억에 의존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복음적 설교는 교회가 미래의 진로를 표시해 주는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주제들을 고려하도록 한다. 그래서 우리가 청중의 요구에 의해 유혹을 받을 때, 신학이 우리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반영하도록 도전한다. 또한 신학은 우리가 사람들의 필요에 맞출 때 일시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도록 그리고 모든 문화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성찰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이렇게 복음적 설교는 설교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에 의해 성취될 설교의 목적에 대해 어떤 설교형식보다 더 큰 비전을 바라보게 한다.

복음을 설교하는 것과 성경을 설교하는 것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성경의 보다 거대한 신학적인 주제들을 설교하지 않고 매 주 성경 본문의 작은 단편들만을 제시하는 설교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성경을 설교하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라는 거대한 맥락 안에서 본문을 보는 것이다. Richard Lischer는 복음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찰하지 않고 곧 바로 본문을 설교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설교자가 본문에서 설교로 직접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한, 설교는 성경의 주장과는 일치하지 않고 질서도 없는 것들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신학자로서 설교자는 어떻게 ‘복음이 전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문을 열어주는지’를 발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복음적 설교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복음적 설교가 신학적 성찰을 통해 전해진다면, 청중에게 단순히 교회가 지키고 있는 믿음을 상기시키는 것을 뛰어 넘어 이해와 변화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이동시킨다. 복음적 설교는 신학적 성찰을 통해 과거의 논쟁적 설교처럼 너무 단순한 수사학의 공식에 의해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의 실생활에 적용시키려는 문제와 영적으로 성장시키지 못하는 패스트푸드용 메시지 같은 변증적 설교의 문제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의 강단은 미래를 준비하면서 기독교 믿음에 대해 듣지 못한 사람들과 이미 익숙한 사람들 모두에게 어떻게 복음을 설교하고, 어떻게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수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위한 설교는 복음적이어야 하며 복음의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공동의 기억을 형성시켜 주고, 더 나아가 공동체로 하여금 비전을 가지고 비기독교인 문화 안에서 어떻게 충실하게 살며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5. 결론

21세기에 들어와 신설교학운동은 이제 30여년이 지난 과거의 것이 되고 있다. 그 이름대로 이 새로운 설교학은 연역적이며 3대지 중심의 오랜 전통을 지닌 설교학에 도전장을 냈다. 청중을 향한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이루려는 이 혁명적 시도는 너무 익숙하여 예측 가능하고 진부한 과거의 논쟁적 설교(Argumentative Preaching)를 긴장과 반전의 극적인 효과를 경험하게 하는 내러티브 설교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내러티브 설교는 성경과 기독교문화에 익숙한 부모 세대에겐 문제와 해결 방식을 주요 전략으로 삼는 변증적 설교(Apologetic Preaching)가 되었다. 그들에겐 내러티브 설교가 다른 방법으로는 들을 수 없는 복음에 관한 선포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이미 알고 있으며 경험한 것들을 확인시켜주는 변증론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설교가 성경과 기독교문화에 익숙한 청중에 의해 이미 확립된 그들의 이해와 경험, 그리고 관습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형식을 취한다면, 그런 설교를 청중과 타협하는 변증적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설교가 청중의 이해와 경험의 현상유지가 아니라 그들에게 관습과 삶의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면, 이제 우리의 설교는 교묘할 정도로 타협적인 양식의 변증적 설교로부터 관습과 삶의 변화를 대담하게 요구하는 도전적인 양식의 복음적 설교(Evangelistic Preaching)에로 돌아가야 한다. 더구나 급속도로 탈기독교화 되어가는 문화의 가치관에 의해 형성되어 성경과 기독교적 선포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자녀 세대가 설교의 주요 청중이 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복음에 대한 확신과 함께 담대하게 선포하는 복음적 설교가 더욱 요구된다. 하지만 과거 한국교회의 강단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그릇되게 적용하여 사회에 영향을 주지 못한 경험을 기억하고, 매일의 삶에서 구원과 부활의 복음뿐 아니라 자유와 고난의 복음까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매우 건설적인 강단을 지켜야 한다.

한국교회 강단의 밝은 미래는 보장되어 있지 않다. 진부하게 보이는 커뮤니케이션의 하나인 설교가 점점 커뮤니케이션이 전산화되고 멀티미디어로 진화되고, 그리고 어디에서나 쉽게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경쟁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럼에도 설교의 미래는 항상 심각한 도전을 받을 때 더욱 새로워졌다. 설교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증언으로 한국교회를 지켜왔으며 성장시켰다. 한국교회 강단의 미래는 결코 손꼽히는 대형교회의 설교자들에게 달려있지 않다. 시대, 지역, 교단을 초월하여 모든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복음을 설교하는 사명과 사역을 함께 공유해야 한다. 한편의 설교가 한 사람의 설교가 아니라 교회의 설교인 것처럼, 한 교회의 설교 또한 한 교회 목사의 설교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설교이기 때문이다.

논평

“한국교회 강단의 미래; 논쟁적, 변증적 설교에서 복음적 설교에로”

논평: 이철승 교수(Ph. D. 대신대학)

들어가는 말

설교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사회가 변화하고 목회의 현장이 변화하고 있다 할지라도 설교의 원리와 본질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설교는 그 시대마다 독특한 메시지의 형태를 가졌고, 시대정신이 스며 있었고, 신학 사조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는 그 시대의 거울과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복음이 우리나라의 불행했던 시대에 들어왔고 기독교가 성장하면서 그 중심에는 역시 설교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맞서 설교와 설교자는 그 도전에 맞서 응전하여 왔다. 그런 의미에서 작금의 현실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새로운 미래의 설교를 예측해보는 일은 가슴이 뛰는 일이 되리라 생각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제도적 영향력을 받아왔으며 그로 인해 여러 가지 설교의 형태들이 시도되어져왔다. 이는 변화하는 세속적 사회와 이에 반하여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는 둘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감의 산물이기도 하다. 설교에서의 이 둘의 긴장은 전혀 새로운 것으로 보기에는 어렵다. 과거에도 있었으며 현재에,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논의도 역시 이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개혁주의 설교학회의 학술세미나를 통하여 한국교회 설교에 대한 희망을 찾고 모든 설교자들에게 좋은 길라잡이의 역할을 하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허도화 교수의 발제에 대해 논평하고자 한다.

I. 논평의 요지는 먼저 발제의 창의적이고도 긍정적인 부분과 동의하는 내용에 대해 언급을 하고 다음으로 미약하나마 논평자의 좁은 관점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을 제시하고자 한다.

1. 허교수는 한국교회 강단의 역사를 구설교학시대(과거), 신설교학시대(현재), 그리고 미래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설교사에 관한 연구는 설교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교회사나 성경해석학을 비롯한 신학적 전반과 사상사, 사회사 , 정치사도 함께 연구하는 포괄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방대한 작업을 시도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한국교회의 설교를 내다보면서 미래 한국교회의 강단이 그리 밝지만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과거보다는 현재, 현재보다는 미래의 설교가 더욱 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2. 그리고 필자는 한국교회 강단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신학적 성찰로부터 3가지의 틀 - 청중의 문화적 상황, 설교자들의 반응 그리고 설교신학적 비판 - 을 제시하고 있다. 이 틀을 중심으로 하여 각 시대마다 청중의 문화적 상황과 그로부터 나온 도전에 설교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살피며, 각 시대의 설교형식에 대해 설교신학적으로 의미 있게 분석하고 있다. 이 틀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설교를 평가하는데 중요한 연구 동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3. 허교수는 한 시대의 설교를 이해하거나 평가할 때에 그 시대의 문화와 청중에 대한 이해 그리고 신학적 검토가 필요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발제자의 논제 가운데 거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평가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회학적 분석이 사회 실재를 설명하기 보다는 복잡한 낱말을 써가며 사회 실재의 복잡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반면 필자는 문화속에서 일어나는 청중의 상호작용의 변화들을 분석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신학적 관점에서 문화적 상황, 설교자의 반응 그리고 신학적 비판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유용한 한계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와 현대 사회에 대한 이해와 분석의 필요성은 크게는 실천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에 필요한 것이며, 설교의 장에서도 정확하고 효과적인 분석의 필연성이 제기된다고 할 수 있다.

4. 그리고 허교수는 현재 한국교회의 설교에서 드러나는 신설교학의 약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한국교회 강단에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설교적 방법론에 대해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자칫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설교의 복음적 본질을 잃어버리고 현상학적으로, 설교의 전달에만 치중하는 신설교학에 대한 일종의 막연한 신기루적인 현상에 대한 지적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매일의 삶에서 구원과 부활의 복음 뿐만 아니라 자유와 고난의 복음까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복음적 설교에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의 주장대로 미래 사회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도전적인 복음적 설교에 대한 이해와 준비가 필요하다.

허도화 교수의 깊은 학문적 연구와 통찰력에 감사드리면서 학문적 발전을 위해 몇 가지 비평적 제언을 한다면,

1. 우선 이 논문의 실천신학적 연구 방법론이다. 허교수께서는 서론에서 이 연구가 신학적 성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라고 제시하고 있지만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 때에 많은 부분이 역사적, 경험적 연구의 접근이 필요함을 보게 된다.

2. 둘째, 문헌에 대한 지적이다. 청중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분석을 볼 때에 과거 한국교회의 설교에 대한 전반적이고도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역사적 자료가 필요하다. 특히 당시의 일차적 문헌에 대한 연구는 당연하다고 본다. 즉 당시 대부분의 설교가 설득적 설교라고 주장하는데 그에 대한 분명한 1차적 증거 문헌들이 제시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적 설교자들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반응을 분석하면서 오히려 서구 설교자들의 수사학적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다소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거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의 경향을 분석하는데 있어 한 사람의 연구에만 의존한 듯한 인상을 지울수가 없다. 이는 각주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거의 한 사람의 입장이 반영되고 있다.

3. 허교수는 초기선교사들의 설교가 배타적이며 근본주의적이었다는 평가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다소 의견을 달리한다. 초기 한국 교회 선교사들이 신학에 대한 분명하고 명쾌한 해석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성경적인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윤리를 설교했다. 이에 대해 이만열 교수도 지적하기를, 실제적으로 초기 한국 교회 선교사들은 미국의 보수주의적인 신학 사상과 청교도적인 생활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 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신학적 입장과 청교도적인 삶의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자연히 그들의 설교는 기독교만이 절대종교이며 참된 윤리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고 본다. 실제로 곽안련 박사의 설교나 길선주, 그리고 주기철 등 당시의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여다보면, 고난 받는 한민족에게 결정적인 메시지보다는 순수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음을 볼 수 있다.

4. 허교수께서 선교 초기부터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설교형식은 어거스틴이 가르친 설득을 위한 논쟁적 설교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리스토텔레스나 John Broadus의 수사적 구조를 인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당대의 설교자들이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여 자신의 설교를 위해 설득적 과정을 검토했었을까 하는 점이다. 있다면 좀 더 구체적인 자료들을 제시받고 싶다.

5. 복음적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필자는 결론적으로 한국교회 강단의 미래는 낯선 이들을 위한 복음적 설교이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 때 복음적 설교란 케리그마와 디다케의 기능을 모두 포함하는 통합적 기능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각주에서 C. H. Dodd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논평자가 보기에는 다드는 그의 책에서 케리그마와 디다케를 엄연하고 구분하고 있다고 본다. 즉 그는 설교를 케리그마로, 가르침을 윤리적 교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초대교회에 있어 복음을 설교하는 것과 도덕적 교훈 혹은 권고를 말하는 것과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었다’ 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다드는 필자가 각주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공적 선포인 복음전도 설교(kerygma)와 믿음으로 세워진 공동체를 위한 설교(homilia)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 그 자체가 복음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닐까? 즉 역설적으로 디다케는 설교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Daniel Baumann 역시 그의 책 ‘An Introduction to Contemporary Preaching'에서 복음설교 또는 복음적 설교를 케리그마적 설교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케리그마와 디다케의 통합은 어떻게 규명되어져야 하는가?

6. 마지막으로 필자는 미래 한국교회의 청중은 기독교 대학의 체플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의 설교에 익숙하지 않는 이방인들 즉 낯선 사람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미래 한국교회 설교는 복음을 그대로 설교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므로 복음적 설교가 아니라 바울의 변증적 설교가 기독교를 탄생시키고 확립한 것처럼 다원종교 상황속에서 변증적 설교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나가는 말

이상과 같이 논평자는 허도화 교수의 ‘한국교회 강단의 미래: 논쟁적, 변증적 설교에서 복음적 설교에로’ 에 대한 건설적인 측면과 비판적인 측면을 고려하였다. 그리고 논평자 나름대로 적용을 시도해 보았다. 전체적으로 허도화 교수의 논지는 이 시대의 설교자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설교를 예측하게 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현 설교자로서 새로운 미래를 예측하면서 다시 한번 한국교회 강단을 위해 고민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한국교회의 설교의 전반을 제한된 지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익하고 통찰력있는 접근을 하였다고 본다.

설교가 바로 행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에 바른 직시와 이해가 있을 때에 가능하다. 설교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대표(represent)하는 도구로서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의 과거, 현재의 사회 변화에 대한 연구는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이 논문을 통해 변화하는 세계 속에 있는 교회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교회의 사역 중심에 있는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설교자에게 이 두 축에 대한 이해와 해석 그리고 전달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변할 수 없는 사명감임을 느끼게 해준다. 신선하고 도전적인 발제를 하여 주신 허도화 교수께 존경의 뜻을 표하면서 부족한 논평을 마치고자 한다.

부흥과 설교; 부흥시대의 설교를 통해 바라본 현대 설교의 미래적 진로

발제: 이우제 교수 (Th. D. 백석대학)

논평: 마문철 목사 (Ph. D. 새길교회 담임)

발제자: 이우제 교수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카나다 틴델 신학대학원(Dip.)

미국 칼빈 신학대학원(Th.M)

남아공 스텔런보쉬 대학교 신학박사(Th.D)

현, 백석대학교 설교학 교수

논평자: 마문철 목사

순천대학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M.div.)

장로회신학대학 (Th.M.)

백석대학 (Ph.D.)

현, 새길교회 담임목사 (서울관악구 중앙동 소재)

부흥과 설교; 부흥시대의 설교를 통해 바라본 현대 설교의 미래적 진로

발제: 이우제 교수 (Th. D. 백석대학)

I. 서론

러시아 속담에 “과거에 안주하는 사람은 한쪽 눈을 잃은 것이지만, 과거를 잊어버린 사람은 두 눈을 다 잃은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과거 역사를 인식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따라서 현재를 온전한 시각을 상실한 채 한쪽 눈의 기능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두 눈 모두를 잃어버린 소경으로도 살아갈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를 그대로 모방하여 오늘에 재현하려는 사람들이 전자에 속한다면, 과거를 아예 망각이라는 강물에 떠내 보내는 사람들은 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렇게 우리들의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이 현재적 삶을 향한 진로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여 가치 있는 교훈들을 오늘을 위한 바른 지침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온전한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과거에 귀를 기울어야만 한다. 현대 설교의 진로를 위하여 우리가 되돌아보아야 할 무수히 많은 역사적 유산들 중에 현재 초미의 관심거리로 논의되고 있는 주제는 아마도 생명력 있는 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되었던 시기의 설교일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설교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 신앙이 흥왕하던 때는 언제나 능력 있는 강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교회가 사탄의 권세를 부수고 영광스러운 승전가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두운 역사 가운데서 세례요한이 능력 있게 말씀을 전했을 때, 무리, 세리, 군병이 차례로 걸어 나아와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자신들의 갈 길을 물었던 것같이, 성경과 교회사는 능력 있는 말씀 사역은 세상의 돌아옴과 주의 백성들의 심령 속에 부흥의 불꽃이 따 오르게 하는 일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강력한 부흥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설교를 뒤바꿔 놓았다. 무기력한 설교에서 생명을 살리고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설교가 회복된 것이다. 이러한 강력한 설교를 가능케 했던 오순절의 역사는 “제2의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목숨을 걸고 말씀의 우위성을 회복하려는 영적 부흥운동이었고, 영적 대각성 운동이었다. 모든 세기에 일어난 영적 부흥과 각성의 이정표가 되었던 종교 개혁은 17의 청교도 운동과 18세기의 휫필드, 웨슬리, 에드워즈를 중심이 된 영적 부흥 운동에 그 바톤을 넘겨주게 되었다. 그리고 간헐적이기는 해도 19, 20세기의 복음주의운동과 선교 운동을 통해 부흥의 횃불이 전달되었다. 놀라운 점은 이 부흥과 갱신의 근저에는 강력한 말씀사역이 존재하였고, 그로 인해 회중들의 삶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시대를 깨웠던 작고 큰 영적인 부흥과 각성의 시기의 설교정신과 형태가 점차로 세상문화의 기준을 따라가는 현대적 설교사역의 정황가운데 어떤 교훈을 제공하는가?

이 논문에서는 러시아 속담이 던져주는 권면에 유념하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과거를 망각하여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과거의 교훈과 연속성을 찾고자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굽이쳐 흐르는 역사의 골짜기마다 사용하셨던 부흥과 각성 시대의 설교자와 설교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의 특징을 요약하면 설교 본질에 대한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설교의 본질은 결코 바뀔 수 없기에 우리들이 행하는 설교는 본질에 충실했던 위대한 역사적 전통과의 연속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고려해야할 것은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맹목적으로 모방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안주함으로서 한쪽 눈의 기능을 잃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의 교훈에 대한 현재적인 적실성(relevance)을 심도 있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과거와의 불연속적인 측면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불연속성이라는 말이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구태의연한 답습을 넘어서 그것을 수정, 보화, 그리고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과거는 무비판적인 모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창조적인 선용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설교란 다름 아닌 각 시대의 회중을 향해 말을 걸어오는 행위이기 때문에, 불변적인 요소에 가변적인 요소를 조화시키는 통합적 관점의 새로운 형식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II. 위대한 유산으로서 영적 부흥과 설교의 본질 회복

우리는 지금 그동안 우리를 지탱시켜주었던 절대적 진리의 기반을 상실한 “터가 무너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절대 기준과 가치관이 무너진 시대는 자신의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는 상대적 가치관이 팽배하게 되는 시기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들이 행하는 설교사역의 분야에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점차로 현대 설교학은 “설교란 과연 무엇인가? 설교는 왜 하는가?” 라는 대한 물음보다는 “설교를 통해 어떻게 청중의 현실적인 필요나 현대적인 문제의 해답을 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과도하게 집중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설교를 값싼 싸구려 복음의 제시나 성경 본문과 교리를 상실하면서까지 과도하게 청중의 구미에 맞는 메시지로 전락시켜 버렸다. 신설교학(new homiletic)적 경향으로 대변되는 다양한 설교 이론들이 전통적인 설교 한계를 넘어가려는 대안들로 제시되었다.

현대의 무기력한 강단을 치유하기 위해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선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시도가 우리의 설교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창균 교수는 이러한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진단”으로 인한 “현상학적인 해답”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더 심각한 문제인 설교의 “존재론적인 위기”를 낳았다고 진단한다. 우리의 문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청중들을 가장 심도 있게 변화시켰던 과거의 부흥과 각성 시대의 전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설교의 본질을 찾아내는 일이다. 위대한 영적 각성과 부흥이 펼쳐질 때마다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던 설교적 유산들을 통해 현재 우리들이 행하는 설교 사역의 방향성을 진단하고 놓쳐서는 안 되는 설교의 신학적 독특성을 점검해야만 한다. 특별히 과거와의 연속성의 측면에서 설교사역의 본질규명을 “하나님 영광을 추구하는 설교,” “사도적 케리그마를 회복하는 설교,” “복음의 능력 회복하는 설교”의 메시지로 나눠서 각각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세 가지 회복의 영역은 현대 설교학이 깊이 영향 받고 있는 3가지 세속 문화적 관점들, 구경꾼 중심주의적 태도, 소비자중심주의적 태도, 테크닉 중심적 태도에 대한 처방으로 제시되고 있다.

2-1 재미를 추구하는 설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설교의 목적 회복

부흥과 각성시대의 설교로부터 한국교회가 주의를 기울어야 할 첫 번째 교훈은 설교사역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적인 목적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적 설교란 단순히 현대 청중들과의 성공적인 대화의 길을 모색하는 의사소통 방법을 넘어서는 신적 커뮤니케이션의 측면, 즉 영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영적인 본성이 점검되지 않은 채 행해지는 단지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만드는 설교는 궁극적으로 회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상실하게 되는 설교답지 못한 설교이다. 설교가 세속적 강연이나 연설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현대 설교학적 경향에서 눈에 뜨게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본성을 강조하는 설교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현대의 설교학의 주된 관심은 인간 경험에 호소하는 설교를 만드는 일이다. 복음을 다시 새롭게 경험시키려는 시도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그것을 이뤄내는 방식에 있어서 과도하게 메시지의 모든 관심을 청중의 흥미와 재미에 호소하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성경을 오직 경험론적인 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함으로서 현대인의 기호에 우선순위를 두고 설교를 전개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설교적 방향성이 갖고 있는 위험은 신학(theology)과 인간학(anthropology)의 사이의 균형 상실이다. 신학적 반성이 없는 세속적 인간학으로 떨어졌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을 건전한 성육신적 설교 신학의 관점으로 비판한다면, 현대 설교적 경향이 지나치게 인간적인 국면이나 실존적인 측면에 의존하다가 설교가 갖는 신적인 측면 혹은 성경적인 관점을 망각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이렇게 설교를 청중의 흥미 유발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시도는 그들의 설교학이 지나치게 현대 지배적인 서구 문화의 경향을 신학적 비판 없이 수용한 것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정신이 바로 “구경꾼”(spectator)문화를 따라가는 것이다. 현대인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늘 새로운 재밋거리를 찾아다니고 있다.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재미있는 일로 자신의 삶을 채워야 만족하는 “오락 욕구”에 중독되어 있다. 문화의 거울 노릇을 하는 텔레비전은 한마디로 이 시대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잘 대변하고 있다. 모든 프로그램이 흥미와 놀이 위주로 짜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텔레비전은 청중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쉼 없이 우리의 정신을 혼미케 하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우리를 흥분상태 가운데 온통 열광하도록 만든다. 어느 사람의 잘 정의하였듯이 텔레비전은 “눈으로 씹는 껌”이다. 재미라는 단물이 있을 때까지만 씹고 버리는 껌 말이다. 이런 찰나적인 재미에 노출된 현대인은 늘 오락 거리를 찾아다니는 “죽도록 즐기기” 경향으로 치달아 가게 된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핸더슨의 말을 들어보자: “...이렇게 되면 계속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자극이 몰려오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휘몰아치는 줄거리를 따라잡기 위해 전개되는 이야기에 폭 빠져들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무언가 끊임없는 움직임, 무지막지하게 큰 소리, 계속하여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춤에 빠져서 사는 것을 좋아하게 되고, 또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현대 설교학은 심하게 말하면 바로 이 구경꾼 문화에 사는 청중을 사로잡는 메시지를 전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등장한다. 신설교학의 창시자인 크래독은 청중들에게 지루함을 주는 것은 죄라고 단정하면서, 지루함을 깨는 설교의 길을 제시하게 된다. 1971의 크래독이 귀납적 설교라는 이름으로 전통적인 설교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주장한 이래로 새로운 설교학은 탄력을 얻어 다양한 이론과 제목으로 확대되어가고 있지만 그 공통적인 전제는 구경꾼을 만족시키는 복음전달의 방식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대 설교학이 추구하는 설교의 목적은 세상문화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구경꾼을 즐겁게 하는 사역으로 전락해 버릴 위험이 있다. 구태의연한 태도를 변화하는 시대의 청중을 대하는 전통설교의 한계를 지적하려는 새로운 설교적 접근을 역설하는 그들의 순수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설교의 목적을 시청자의 관심을 사로잡기 원하는 프로그램 제작자의 목적과 일치시키려는 자세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어질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세상 문화에 무릎 꿇게 되는 설교의 굴욕이기 때문이다.

부흥과 각성시대의 설교는 설교의 목적이 회중을 즐겁게 하는 것 이상의 문제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증적으로 알게 해주는 성경과 교회역사의 아름다운 유산이다. 인간은 깊이 있는 삶을 망각케 하는 감각적인 쾌락이나 오락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재미는 우리 삶을 구성하는 일부이기는 해도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는 재미보다 하나님을 추구해 가는 것이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힌 즐거워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이 그러하다면, 설교의 중심주제와 목적도 역시 하나님 영광이어야 한다. 존 파이퍼의 주장처럼, “설교자의 목표는 바로 사람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부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질문은 그렇다면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설교자가 인간에 대한 메시지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메시지를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부흥시대 설교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설교는 사변적이고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회개를 통한 회중의 회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현대 설교가 세상 문화의 정신을 따라 삶을 즐기는 사람을 더 즐겁게 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위대한 부흥 시대는 사람을 진정한 회심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세우고 또 다시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추구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단지 설교가 하나님을 언제나 언급하거나 모든 본문을 신 중심적인 관점으로 풀어간다는 차원에서 확보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설교자를 통하여 회중가운데 단회적으로 발생하는 “진정한 변화”로서의 회심의 역사와 또한 회중 가운데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지속적인 변화”로서의 회심의 역사로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그 좋은 실례가 바로 부흥 시대의 설교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설교를 포함한 자신의 모든 사역의 가장 큰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면서도 설교의 핵심을 회중의 “구원(회심)에 관한 설교”에 집중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회심을 통한 중생과 계속적인 영혼의 각성과 부흥을 통해 이뤄진다. 참된 회심을 통해 구원을 경험한 자로 지속적인 회심의 과정인 성화의 길을 걷게 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이끌리게 된다.

2-2 소비자 중심적 설교에서 케리그마적 설교의 내용 회복

부흥과 각성시대의 설교로부터 한국교회가 주의를 기울어야 할 두 번째 교훈은 설교사역에 있어서 사도적 케리그마 선포를 통한 설교 내용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설교란 단순히 현대 청중들을 위한 도덕적 강화나 윤리적 교화를 넘어서는 선포된 특별한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전하는 것이다. 사도들이 선포했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점검되지 않은 채 행해지는 단지 청중들의 생활을 교정하고 교육하는 설교는 좋은 충고(good advice)는 될 수 있어도 좋은 소식(good news)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죽음 가운데 있는 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치유와 구원 그리고 영생의 메시지가 된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한 간수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절규하였을 때, 사도를 통해 제시된 대답은 바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긴박한 복음의 메시지이다.이렇게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여져서 소망이 없는 인생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긴박한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다. 그리스도 외에는 인생의 참된 치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현대 설교학의 두드러진 경향은 바로 이러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이 사랑과 구속을 보여 주면서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를 믿도록 독려하는 복음 중심적 설교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점이다. 다드(C. H Dodd)는 현대 설교의 최대 위기를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공중 선포”라고 정의되는 케리그마를 상실한 채 행해지는 단순한 인간적인 필요성에 호소하는 권면이나 교훈 그리고 설명으로 흐르는 것이라고 옳게 지적하고 있다. 현대의 설교학의 주된 관심은 청중의 상황과 그들의 느껴진 현실적 필요(felt need)에 대한 개인적이고 심리 치료적인 복음을 제시하는데 집착되어 있다. 물론 그들이 문제 해결식의 설교의 방식을 통해 나름대로 청중들의 상황에 대한 처방으로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문제는 그들이 제시하는 처방이 지극히 성경 내러티브의 핵심 인격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기보다는 청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있다. 거기서 성경이 제시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의 메시지와 사도적 케리그마는 실종되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청중의 느껴진 필요에서 출발하여 그들의 욕구를 만족 시키는 설교는 “소비자”(consumer)로서 청중을 대하려는 우리시대의 소비자 중심주의적 견해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기업들은 온통 마케팅 전략으로 소비자의 구매를 촉진시키기 위한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 비즈니스 세계에서 소비자는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섬기고 받들어야져야 할 왕으로 여겨지고 있다. 소비자 문화는 새롭게 청중의 구미를 사로잡는 세련된 상품이 계속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게 만들어 더 많은 선택권을 구매자에게 제공해 준다. 이러한 소비자 중심주의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내게 꼭 맞는 것’을 찾아다니며,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진리로 여기는 삶의 태도를 갖는다.

현대 설교학은 어찌 보면 바로 이 소비자 문화에 사는 청중에게 호소하는 실용적이고 필요중심의 설교(need-oriented preaching)의 길을 제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마케팅 전략의 영향력 아래서, 복음은 생산품으로 여겨지고, 설교자는 생산자로 회중은 소비자로 취급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 가운데서 생산품과 생산자는 모두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 항상 중심에는 소비자들인 회중이 존재하게 된다. 소비자들인 회중은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경우에든지 옳다. 이러한 견해는 설교에 있어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무시했던 회중의 위상을 끌어올린 점과 기독교 신앙이 회중에게 던져주는 유익을 어느 정도 설명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인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견해는 기독교의 복음의 메시지를 송두리째 왜곡 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의 복음은 소비자 문화의 시각에서 인식되는 것처럼 경쟁적인 종교 상품들 가운데 어는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복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결단의 요청이다. 회중이 우선이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 속에 담겨진 주님의 뜻이 최우선이다.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청중이 필요를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니라, 준엄한 명령이요 반드시 따라야 할 삶의 방식이다.

다양한 부흥과 각성 시대의 설교의 공동적인 특징은 바로 회중을 개인적인 선호도로 메시지를 구매할 수 있는 소비자로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회심이 필요한 개종자로 취급하고 있는 점이다. 회중들의 개종을 위해 필요한 메시지는 사용자에게 편리한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케리그마 선포에 있다. 왜냐하면 케리그마 설교의 목적이 다름 아닌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사도적 케리그마를 회복해야 한다는 논증에 대하여, 과연 1세기 이교도적인 상황 가운데 있는 사도적 케리그마 설교를 21세기의 설교를 위한 교훈으로 제시하는 것이 과연 타당 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을 작금의 한국 교회가 직면한 교회 밖 상황과 교회내의 상황의 위기 국면이라는 나눠 설명해 보기로 하자. 분명히 우리들이 직면한 세상의 외적인 상황은 1세기와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이 성경과 친숙하지 않은 후기 기독교 문화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점에서 1세기의 정황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톰슨의 주장대로, 환경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영적인 상태 면에서는 동일하거나 어쩌면 더 심각한 지경에 놓여 있기 때문에 한국 교회 강단은 다시 사도적 케리그마의 회복해야만 한다.또한 사도적 케리그마 설교가 교회내에서도 여전히 필요한 이유는 교회에 넘쳐나는 비 중생인과 중생한 기독교인들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을 중생자로 여기는 것은 지나친 낙관론이다. 회심하지 못한 채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비 중생인들이 있다. 이들에게 케리그마 설교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어진다. 비록 케리그마가 불신자를 회개케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필요하다. 흔히 “개심자들을 위한 윤리적 교훈”적 가르침을 케리그마와 구별되는 디다케로 표현하지만, 이 둘을 날카롭게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디다케는 하나님의 우아한 케리그마이다. 케리그마는 하나님의 기술된 디다케이다.” 이장의 주제와 관련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디다케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능을 감당하려면 사도적 케리그마의 내용이 토대가 되어야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디다케도 케리그마에 기초를 두고 있다면 개심자들의 윤리적이고 성화적인 삶의 변화를 이루는 설교는 케리그마적 디다케 설교가 될 것이다.

2-3 테크닉에 의존하는 설교에서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 의존하는 설교의 능력 회복

부흥과 각성시대의 설교로부터 한국교회가 주의를 기울어야 할 세 번째 교훈은 설교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주권적 역사를 통한 설교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설교란 단순히 현대 청중들을 위한 설교자 개인의 인간적이거나 인위적인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부으심을 통한 사역이다. 성령의 능력 부으심이 전제되지 않고 전달되는 테크닉이나 방법론에 의존하는 설교에서는 설교자가 주체가 되고 성령이 설교자의 불완전을 통해 생긴 균열을 메워 주는 존재로 기능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은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설교할 것을 천명했던 바울의 정신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능력만이 말씀 선포 사역의 효력을 발생케 한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주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게 하신 누가복음 24: 49와 그 결과로 주어진 사도행전 2장의 메시지이다. 제자들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3년 동안 제자 훈련 과정(?)을 이수하였고,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사명이 복음을 지식으로 전달하는 것이었다면 충분한 자격을 갖춘 셈이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반드시 증인이 되려면 한 가지 선행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씀 하신다. 그것은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한 능력이 부어짐을 통해 어떤 결과가 생기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놀라운 것은 성령 강림 사건은 무기력하게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회색지대에 속한 신앙적 삶을 살던 베드로 사도를 능력 있는 말씀의 선포자로 세워놓은 점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전달되는 설교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어찌 할꼬 하면 갈 길을 묻는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을 뛰어넘어 재산을 함께 공유하는 참된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로 변화되어진다. 모두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 하는 말씀 때문에 생겨진 결과였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오늘날 조국 교회강단이 직면한 중대한 문제는 영적인 열정에 사로잡힌 능력 있는 설교가 자취를 감추고 대신에 방법론에 의존하는 설교가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점이다. 마치 이러한 현상은 부흥(revival)은 사라지고 부흥주의(revivalism)만 남아 있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흥은 무엇이고 부흥주의는 무엇인가? 마크 쇼는 에드워드가 말하는 부흥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한다: “진정한 부흥 이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에 대한 관념을 회복 시키는 성령의 주권적인 기름 부으심이다.“ 부흥에 대한 용어적 혼란을 피해야 할 것을 역설하면서 백금산 목사는 ”부흥을 1) 교회 위에 2) 주권적으로 3) 성령을 부어주시는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첫째, 부흥의 일차적인 대상은 불신 세상이 아니라 교회이다. 부흥이 임하면 교회의 성도들은 다시 살아나 영적 생명력을 회복하게 된다. 둘째, 부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부흥회나 부흥을 위한 모임을 갖는 것과 부흥이 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하나님의 일이다. 셋째, 부흥의 내용은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심이다.이에 반해서 부흥 주의(revivalism)는 인간적인 방법론을 통하여 부흥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자세를 말한다. 부흥 주의의 모델을 제시한 사람은 찰스 피니 (Charles Finney)이다. 부흥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강조한 에드워드와는 달리, 찰스 피니는 부흥을 인간적인 노력의 소산물이며 치밀한 계획과 과정을 따르게 되면 맛볼 수 있는 경험이라고 보았다.이러한 피니의 견해는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최소화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설교자의 방법론은 성령님의 주권적인 사역을 대치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간적인 테크닉에 의존하는 설교사역의 명백한 한계이다.

그렇다면 참된 부흥을 추구하기 위해서 한국 교회의 강단이 시급히 회복되어야할 것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찰스 피니의 인간중심적이고 테크닉 의존적인 입장을 배격하는 것이고,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영적인 긴박감을 가운데 신 중심적인 관점을 견지한 상태로 성령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을 갈망하는 설교를 전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점검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로 테크닉 의존적인 입장을 배격하는 것이 테크닉을 사용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이 쓸 수 있는 방법론은 중립적 가치를 갖는다.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비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례로 바울도 수사학 자체를 거절하지는 않는다. 수사학을 육신의 방법으로 의존하는 것을 거절할 뿐이다. 둘째로 성령 기름을 갈망하는 것이 신비한 체험 자체에 탐닉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령의 능력이 회복되는 설교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감정주의에 근거한 은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그 분이 능력으로 임하는 곳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풍성한 임재가 넘치게 된다. 이 사실을 로이드 존스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함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행하시는 최상의 사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 하셨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그러므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최상의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100년 전 부흥이 임했던 모든 나라가 즐겨 불렀던 찬송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부흥의 체험을 하는 곳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III. 위대한 유산으로서 영적 부흥과 설교 형식의 재고

지금까지 조국 교회가 성경과 교회 역사의 위대한 유산인 부흥과 각성 시대의 설교 정신을 본받아야 것을 살펴보았다. 한국 교회의 설교가 살아나려면 부흥시대와의 연속성의 측면에서 설교 본질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설교의 본질은 불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진정한 말씀 사역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시대의 상황은 늘 바뀌기 때문에 설교 형식은 늘 가변적이다. 예를 들어 부흥시대의 설교의 모체가 되고 있는 “청교도방식의 설교 스타일”을 그대로 오늘에 재현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우리시대의 설교의 방향성에 대하여 개탄하면서, 위대한 청교도 “리차드 백스터”의 설교적 지혜를 본받아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는 머레이 카필(Murray Capill) 조차도, 청교도 시대의 설교 스타일 혹은 설교 형식을 그대로 모방한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청중과 의사소통하는데 있어서 낭패를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에게 진실로 요구되는 것은 역사적 부흥 시대의 설교들에게 대한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정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정신과의 깊은 대화에 있다. 우리는 지금 숨 가쁘게 변화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이 호령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과거 유산의 위대한 정신을 밝혀주는 “설교 본질”에 대한 교훈은 흔들림 없이 오늘 것으로 수용하되, “설교 형식”은 언제나 시대를 살아가는 청중의 정황을 고려하여 보다 진일보한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있다. 과거와의 연속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과거와의 불연속적인 측면을 심도 있게 고려해야만 본문의 메시지를 우리 시대의 청중들의 삶의 자리에로 효과적이고 적실하게 연결시킬 수 있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부흥과 각성 시대에 전형이었던 과거 선포식 설교의 특징과 그것에 대한 현대 설교학의 도전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에 새로운 설교 형식이 줄 수 있는 공헌을 무엇인지를 논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통합적이고 절충적인 설교형식에 대한 필요성이다.

3-1 “선포식 설교”의 특성

선포식 설교는 전통적인 설교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다. 부흥과 각성 시대에도 거의 예외 없이 강력하게 복음을 선포하여 사람을 회심에 이르게 하고, 더 성숙한 삶을 향한 교훈으로 인도하는 설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어떤 비판이 가해진다고 해도 “선포식 설교”는 설교자들이 포기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유산이다. 절대적인 기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청중에게 어쩌면 분명한 삶의 기준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설교가 더욱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문제는 선포식 설교가 청중에게 영적인 척도를 제시하는 권세 있는 말씀으로 쓰여야지 그들을 억압하고 그들에게 권위를 내세우는 설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리에 대한 자신을 갖되 진리 전달에 있어서는 온유함과 겸손함을 가져야만 한다. 갈수록 하찮게 여겨지는 선포식 설교가 다시 한 번 더 우리 시대가운데 귀한 전통으로 살아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부흥과 각성 시대의 전형이 되었던 선포식 설교의 갱신을 위해서는 선포식 설교가 과연 무엇이고 어떤 설교의 구성과 전달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를 “이성적 논증으로 분명한 논지를 설명하는 강력한 삶의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로 정의하고 싶다. 이것을 보다 세분화해서 설명하면 선포식 설교는 1) 명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설교 2) 이성에 호소하는 설교 2) 강력한 삶의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선포식 설교는 명제적인(propositional) 특성을 가지고 있다. 명제적이라는 것은 설교자가 성경에서 얻어낸 해답 혹은 개념을 일방적으로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설교를 의미한다. 성경이 명제적인 진리를 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명제적 형식의 설교는 히브리적 사고에서 보다는 헬라적 사고를 통해 기독교적인 설교의 주류를 형성하는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계몽주의의 영향력으로 정착된 명제적 스타일은 먼저 본문에서 설교의 중심 명제가 될 수 있는 중심 주제를 선정하여 그 중심 주제를 지지하는 3-4개의 대지를 통해 설명하고 예증하면서 권하여 그것을 청중의 삶에 적용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이렇게 명제적 스타일은 연역적 논리전개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탕자의 비유를 설교할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가 서론에서 제시하고 본론에서는 세 가지 대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예증하게 적용하는 한 후 결론에 이르게 되는 설교이다. 이러한 설교는 연역법의 어원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무엇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de ducere; lead from)으로 본문의 자료를 배열하는 것에 중심을 둔 형식을 취하게 된다.

둘째로 선포식 설교는 이성에 호소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중심 주제를 지지하는 세 가지 대지를 통한 논증을 전개해 연역적이고 명제적 설교로 나아가기 때문에, 설교는 자연스럽게 이성에 호소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 입문한 초신자에게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을 논증해 가려고 한다면, 선결조건은 “구속”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주는 것일 것이다. 선포식 설교가 인지적인 측면(cognitive aspect)을 중시하는 지식 전달형태로 나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과 깨달음이 없이는 힘 있게 진리를 따라 살 수 는 없다. 흔히 우리 시대가 느낌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성경에 대한 지식을 전제하고 설교를 전개해 나가거나 심지어 지식을 간과하려는 태도는 선포식 설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려하는 바이다. 선포식 설교를 회복을 꿈꾸는 설교자 마스터스(Masters)는 감정 호소하는 설교 스타일은 허구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천박한 설교라고 단죄하면서, 선포식 방식은 반드시 이성에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성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는 부흥 시대의 설교자 조니단 에드워즈와 그의 강력한 추종자 로이드 존스에게서 분명히 확인된다. 에드워드가 비록 신앙의 정서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신앙의 정서는 반드시 지성에 기초하여야 한다. 지성의 관문을 통해서만이 정서는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성의 고양을 위하여 이성과 논증을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본다. 로이드 존스도 진리는 먼저 인간 지성을 지나 감성과 의지로 나아가게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셋째로, 선포식 설교는 회중에게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촉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선포식 설교는 직접 적인 전달 방식으로 청중에게 강력한 촉구를 선호한다. 부흥과 각성 시대에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직접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들은 직접적인 선포방식으로 강력하게 회중을 죄에 대한 확신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스터스는 현대에 유행하는 흥미와 구도자 중심의 예배 분위기와 설교의 형태와는 달리, 선포식 설교를 주창하는 이들은 “성령께서 축복하신 직접적인 선포라는 방법은 영혼을 사로잡아 죄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유일한 방편”이라고 믿었다. 직접적인 선포를 통한 죄의 자각은 자신들의 비참을 위해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음을 확실하게 붙잡게 할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1741년 6월 8일 노샘프톤의 앤필드 마을에서 행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 (Snners in the hnads of Angry God)설교는 바로 그 확실한 예증이 되고 있다. 에드워드는 현대인들이 거부하게 느끼는 지옥에 대한 실상을 경고적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음을 본다.

지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맹렬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난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상에 있는 큰 무리들에 대해 훨씬 더 크게 분노하고 계십니 다.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러실 것입니다. 지금 지옥의 불 속에 있는 많은 이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보다 더 크게 분노하고 계실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모르고 평안하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붙잡은 손을 놓아 당장에 그들의 생명을 거두시지 않는 것은 그들의 악함을 생각하지 않거나 분개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그들을 향해 불타오르고 있으며, 저주는 잠들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무저갱이 준비되어 있고, 불이 이미 예비 되어 있으며, 용광로가 활활 타올라 뜨거워져 있어 그들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불꽃이 격노하게 거센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번쩍이는 칼이 뽑혀서 그들을 향해 내려질 준비가 되어 있으며, 무저갱이 그들 아래서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인 선포를 통해 회중을 주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설교에 충실 했던 부흥시대의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하나님에게 보내심을 받은 대사로 인식하고 있었다. 대사는 자기가 받은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사실 그대로를 가감 없이 외쳐야 하는 고지자 (crier)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정리하면 선포식 설교는 명제를 서론에서 제시하고 그 명제를 설명과 예화를 사용하여 논증하여 강력한 촉구로 귀결 짓는 설교의 방식이다. 설교자가 신적 권위를 가지고 회중을 삶의 진정한 변화를 꿈꾸는 선포식 설교의 영향력은 2000년 교회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선포식 설교는 무엇보다도 본문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회중에게 쉽게 적용할 수 있기에 성경의 어떤 주제나 교리를 명확하게 가르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3-1 선포식 설교에 대한 비판과 미완성의 도전

교회 역사가 입증한 선포식설교가 가지고 있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선포식 설교를 한계가 지적하는 움직임이 생겨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1970년대에 태동하게 된 귀납적 설교와 그 정신을 계승하는 네러티브 설교, 현상학적 설교, 그리고 이야기식 설교들로 대변되는 신설교학이다. 신설교학의 주창자들은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집중 공략하면서 새로운 설교 사역을 향한 당찬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에 대한 비판의 핵심골자는 선포식 설교가 갖는 성경의 성격에 대한 일방적 이해과 회중을 정당한 설교의 파트너로 고려하지 못한 실패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지성에 호소는 논증을 선호하는 선포식 설교는 주로 교훈적이고 교리적인 설득을 중시하는 설교 방식을 채택하기 때문에, 성경 본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스토리를 설교하는 경우에, 성경 스토리가 가지고 있는 역동성을 놓치게 된다. 지극히 본문을 파편화시켜서 청중을 향한 즉각적인 적용을 선호하기 때문에 스토리 해체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결코 사소한 문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 묵상가인 켄가이어는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고 묵상하는 방식의 한계를 이렇게 지적한다. “시로 보아야 할 성경을 우리는 원리 책자로 공부한다. 아름다움으로 보아야 할 성경을 우리는 신학 논문으로 공부한다. 낭만으로 보아야 할 성경을 우리는 성경 역사 기록으로 공부한다. 사랑으로 보아야 할 성경을 우리는 행동 규범으로 공부한다.”

새로운 설교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갖는 성경의 본질적 성격, 즉 성경 장르에 대한 몰이해 보다 더 심도 있게 지적하는 부분은 변화하는 시대의 청중에 대한 인식 부족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설교가 영상매체 시대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설교하기 때문에 낭패를 보고 있다고 진단한다. 비록 이러한 진단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이 벌어질 수 있겠지만, 그들이 이런 비판을 제기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전통적인 설교는 주로 본문의 내용에 치중하지 청중에 치중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주로 설교의 중심 주제를 만들어 그것을 전개해 나갈 때에 주로 본문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치중하고 있지 청중과의 연결되는 지점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약함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을 토마스 롱이 한 가지 예로 설명하고 있다.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에 서 있는 설교자가 시편 19편으로 제시하는 설교 아웃라인은 다음과 같다:

제목: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

I.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말씀 하신다 (19:1-6)

A. 삶의 조용한 과정에서

B. 세상의 우주적 경이에서

II.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 말씀 하신다 (19:7-11)

A. 성경에서

B. 하나님의 사람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III. 하나님은 삶의 경험을 통해서 말씀 하신다 (19:12-14)

A. 실패와 죄의식에서

B. 좀더 신앙적이 되기 위한 굶주림에서

어떻게 보면 이러한 설교 개요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 롱(Thomas Long)은 이러한 설교는 단순한 논리적인 방식으로 정보를 짜 맞추는 본문의 자료 배열에 머물게 되지 청중을 설교에 참여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없다고 적절하게 지적한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이러한 청중의 참여나 기대감을 저하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전통적인 설교는 자칫하면 청중을 향한 메시지의 적실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 존 스타트의 표현대로 설교는 성경적 세계와 현대의 세계라는 두 개의 다리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바람직한 설교는 성경적이면서도 현대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성경적이어도 현대적이지 못하면 우리의 메시지는 회중을 향한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전통적인 설교에 대한 문제제기는 새로운 설교의 방식을 제언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들이 주로 주장하는 설교의 형식은 위에서 언급한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의 특징을 거절하는 극단적인 입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이 품고 있는 변화하는 시대를 향한 새로운 설교를 만들고자하는 의도가 선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론은 또 다른 일방적인 태도로 전락하게 된다. 극단은 또 다른 극단을 부르는 양극화 현상을 초래할 뿐 현명한 답이 될 수 없다. 오늘 많은 학자들이 그들의 도전을 우려 섞인 심정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설교를 거절하는 새로운 이론을 3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비명제적인 설교를 제시하여 명제적 설교를 낡은 것으로 거절한다. 선포식 설교와는 달리 새로운 설교학적 경향은 성경이 명제를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것이 우리 시대의 청중들에게 전달될 때 명제적으로 선포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현대인은 일방적인 선포를 선호하지 않는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의 느껴진 필요와 삶의 경험에 호소하는 설교가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형식에 대한 방향전환은 연역법을 거절하는 귀납적 논리 전개를 새로운 대안적 카드로 제시하기에 이르게 된다. 귀납적 논리는 구체적인 인간 경험과 필요라는 개별적인 이야기로부터 일반적인 답을 도출해 내는 형식이다. 라틴어 어원이 갖는 의미처럼, 귀납법은 “무엇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설교는 명제의 선포로 제시되기 보다는 설교자와 청중이 함께 답을 찾아가는 여정(journey)이 된다. 설교자는 답을 제시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독자에게 답을 찾게 하는 사람이다. 귀납적인 논리가 설교 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것은 진리의 말씀을 접근해 가는 다양한 전달의 길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나, 귀납적인 설교에 대한 배타적인 의존은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거나 지탱해 나가는데 현격한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확실한 명제가 제시되지 않은 채 추구되는 개인의 경험에 발맞춰가는 개별적인 회중 스스로의 결론을 도출케 하는 설교가 전통적인 설교를 대치해 버리게 될 때, 심각한 우려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선포를 통하여 세워지는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응집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점이다.

둘째로 이야기와 이미지를 중심으로 감성에 호소하는 설교를 제시하여 이성과 논리 중심의 설교를 낡은 것으로 거절 한다. 이야기와 이미지를 중시하는 경향은 현대 문화의 가장 지배적인 특징이다. 이야기와 이미지는 지식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느낌을 창조하는 것에 목표를 두게 된다.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여 신설교학은 성경을 접근할 때 사실 대조 기능(referencial function)으로 대변되는 정보적 측면보다는 시적기능(poetic function)으로 대변되는 심미적 측면에 우선순위를 둔다. 찰스캠벨이 이들이 성경의 장르는 무시한 채 전적으로 비유들에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일방적으로 정서적 영역(affective domain)에 치중한 설교를 만들기를 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들의 주장은 이성에서 감성에 주안점을 두는 설교적 경향은 설교가 인지적 측면에 호소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전인적인 학습 영역(learning domains)에 호소해야 할 점을 인식케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기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엄연한 한계는 성경 장르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선포식 설교를 선호한 전통 설교에 대한 비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든 본문을 비유 스타일로 접근하려고 든다. 만약에 그들의 이론처럼, 이성적 설득이 사라지고 대신에 느낌과 감성에 호소하는 설교가 표준이 된다면, 기독교의 신앙을 공교하게 하는 믿음의 반영적인 영역(affective dimensions of faith)을 상실케 된다. 톰슨의 주장처럼, “믿음은 이해(understanding)를 추구하기 때문에, 설교는 항상 믿음 안에서 더 깊은 가르침을 위한 기회가 되어 왔다. 이야기, 상징, 그리고 메타포는 환기시키는(evocative) 기능을 감당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들은 반영(reflection)을 필요로 한다. 이야기가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시켜주지만,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응집력은 공동체 이야기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셋째로, 간접적인 선포스타일로 직접적으로 회중의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를 낡은 것으로 거절한다. 새로운 설교학적 움직임의 저변에는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반발이 자리 잡고 있다. 과도하게 높여진 설교자의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면서 그들은 “권위 없는 자처럼“설교할 것을 주장한다. 권위 없는 자로서 설교자는 더 이상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행하십시오.“라는 식의 직접적인 촉구를 해서는 안 되고, 오직 청중이 그런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설교를 구성해야 한다고 본다. 그들은 권위적인 설교를 지양하고 오직 설교자와 청중이 원탁의 의자에 함께 둘러앉는 개념의 민주적인 설교(democratic sermon)를 이상적인 선포 스타일로 제시하고 있다. 그들이 주장이 갖는 강점은 설교자의 권위가 본문의 권위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는 일부 설교자들의 자세를 교정시켜주어 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의존해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간접적 선포가 주류가 될 때, 청중을 향해 권세를 가지고 말하거나 청중의 삶을 변화를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차원을 무시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향한 결단과 윤리적인 권면을 강하게 촉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직접적으로 선포하지 않는 설교는 주님의 분부를 간과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청중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권위를 상실한 설교가 될 수 있다. 성경은 내러티브 전통에서 조차도 이야기와 함께 그 이야기에 응답하라는 부르심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톰슨은 다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입증하고 있다: ”이야기조차도 청중의 삶을 향한 요구와 뒤섞여져 있다...출애굽기에서의 강력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내러티브는 십계명을 위한 기초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는 회개하라는 부르심을 위한 기초가 된다. (막 1:15). 바울 서신에서도 복음의 이야기는 그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요구를 함축하고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정리하면, 새로운 설교적 경향은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를 대치할 수 있는 대안이 되기에는 미완성의 도전에 불과하다. 전통적 설교의 한계를 넘어가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일방적 태도 때문에 또 다른 양극화 현상을 야기 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학적 시도는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청중을 위한 적실성 있는 선포의 방식으로 거듭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선포식 설교의 취약점으로 비판 받고 있는 청중과의 접촉점 혹은 청중을 참여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필자는 통합적 설교의 방식이라는 제목으로 연이어 논의할 것이다.

3-3 통합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선포식 설교

부흥과 각성 시대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다시 우리시대의 청중을 사로잡는 힘 있는 설교가 되려면, 본질의 회복뿐 아니라 형식의 회복도 절실히 요구되어진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마인드는 조화와 상호 통합의 정신이다. 본문 중심과 청중중심이 함께 어우러질 때, 연역적 논리와 귀납적 논리가 더불어 춤을 추게 될 때, 강력한 선포와 내러티브적 개방성이 상호적으로 공존하게 될 때,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새로운 부대에 담기게 될 때, 우리의 설교는 이 시대 청중을 위한 적실성 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이런 양자가 함께 공존하는 설교의 형식을 고찰하기 전에 이와 같은 두 요소의 조화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성경적인 증거를 설교자 나단의 설교 형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범죄한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 나단의 환경은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에서의 주된 설교자의 이미지인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사명과 비슷한 긴박감과 진지함으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나단이 다윗을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세우려는 목표로 설교했다는 점에서도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와 맥을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런 목적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점이 밝혀질 때,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가 다시 우리 시대의 회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각성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형식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나단은 목숨을 건 위험한 설교(?)를 명제를 제시하고 대지를 나누는 논리적으로 증명해 가는 방식으로 풀어가는 전통적인 선포식 방식으로 전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극적인 역전의 상황을 염두 해 두면서, 다윗의 죄에 대한 각성, 즉 회심과 변화의 촉구를 위해 반전플롯(reversal plot)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설교자 나단의 의도적인 구상에서 나온 설교 형태이다. 나단의 설교는 마치 신 설교학적이론의 대부 격인 “내러티브 설교“(narrative preaching)의 창시자 유진 로우리의 모호함에서 해답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해답을 지연시키는 형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나단의 설교는 크게 나누면 고대에 있을 법한 구체적인 예화인 비유로 시작하여 다윗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부분(1-6)과 강력한 죄에 대한 책망으로 다윗의 회개에 이르게 하는 부분(7-15a)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결국 나단이 비유를 통해 다윗의 반응을 유도해 내고, 대 반전을 기대하며 자신의 설교를 전개시켜간다는 점에서 현대적 관점으로 말하면 신 설교학적 정신을 수용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결론 부분에 이르러서는 다시 비유에서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한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직접적으로 다윗의 죄를 공격한다. 돌려서 말씀을 전하거나 간접적으로 느끼게 하지 않고 그는 직접적이고 직선적으로 말씀을 선하다는 점에서 결국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와 같은 정신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비록 나단의 설교가 현대 설교와 같이 분석할 수 있는 설교의 전문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특수한 역사적 정황 속에서 전개된 한 개인을 향한 설교이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적 설교의 유일한 모델로 제시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통합적이고 조화를 이루는 설교 형태에 대한 암시를 주기에는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를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통합적 정신을 구현하는 설교 형식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필자가 제시하고 싶은 설교의 방식은 청중을 심도 있게 고려하면서도 본문의 음성을 담아낼 수 있는 성육신적 모델이다. 기본적으로 성육신은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해 허리를 굽히신 사건이다. 성육신의 신비 가운데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가 함께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게 된다. 하늘에 속한 초월적 이야기가 땅으로 침투해 들어와 내재적 사건가 된다. 이렇게 성육신적인 균형 잡힌 만남을 추구하는 설교를 선교학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신학적 문화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학적 문화화란 신학으로 대변되는 본문의 정체성을 어느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구체적인 상황 속에 살아가는 청중을 향한 적실성 있는 메시지를 구체화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찰스 크래프트(Charles Kraft)는 이것을 '역동적 대등 문화 변혁“(dynamic-equivalence transculturation)의 길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곧 텍스트의 번역 과정에 대한 선교학적이고 커뮤니케이션적인 용어이다. 만약 우리가 한국말 성경을 토고 원주민들의 언어로 번역해 주는 임무를 맡았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자세를 견지하게 될 것인가? 일단 본문이 가지고 있는 원어적 의미에 충실히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더 나아가 청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수신자 지향적으로 본문을 수신자의 언어 속으로 성육화(incarnate)시키게 될 것이다.이면에서 크래프트는 설교자의 임무가 다름 아닌 번역자의 임무임을 역설 한다: ”설교자의 임무는....메시지를 바르고 유익하게 해석하여 청자들의 삶에 적용 시키고자 하는 설교자들의 임무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결국 용어가 어떻게 쓰이든지 간에 그 용어가 담고 있는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절대적인 진리를 구체적인 상황 속에 적절히 연관시키는 것이다. 이때 진리의 초문화적인 측면과 대안적 해답을 타협하지 않고 철저한 본문 중심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현재의 문화적 장애들을 넘어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하여 그것이 오늘을 사는 청중들에게 관련성이 있는 메시지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 부흥과 각성 시대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지금도 맹위를 떨치는 선포식 방식의 설교가 진정으로 회중을 고려하는 성육신적 메시지가 되기 위해서 필자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상황적 관점에서 시작하여 규범적 관점을 밝히고 실존적 관점에서 마치는 설교의 방식이다. 정종성 교수는 존 프레임 교수의 제안을 인용하여 이것을 설교의 삼각형 구조라고 칭한다. 첫째로, 상황적 국면을 위해서 언제나 설교를 듣는 회중의 구체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에서부터 설교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청중의 필요에 설교를 정초시키는 과정으로서 이 설교가 어떤 목적 혹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달되어야 하는 지를 분명히 설정하게 해준다. 둘째로 규범적 국면에서는 성경이 그 문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물어보게 된다. 우리의 상황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성경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즉 본문이 밝히고 있는 세상을 전복시킬 수 있는 대안적 음성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설교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주님의 말씀으로 전하는 일을 파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석학적으로 건강함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과, 본문의 메시지가 청중에게 산만하게 전달되지 않도록 중심주제와 대지들을 명료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실존적 국면에서는 그 사람이 그 문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묻어야 한다. 설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데 있다. 이면에서 설교는 적용적이어야 한다. 흔히 우리는 설교의 적용을 설교의 끝부분에 간단히 덧붙이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전체 설교가 적용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것이기에 적용이 곧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가 진행 되어져 가면서 적용을 점점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 되어야만 한다. 3 대지 설교에서 실존적인 국면이 분산되어 드러날 수 있지만, 그 실질적인 클라이맥스는 결론 부분에 도달해서이다. 이전의 실존적인 국면이 잘 다뤄졌다면 결론 부분에서 보다 강력한 선포를 통하여 삶의 변화를 촉구할 수 있게 된다.

정리하면 부흥과 각성 시대의 소중한 유산인 전통인 선포식 설교는 규범적 측면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상황적이고 실존적인 측면을 상대적으로 간과 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말씀의 뜻만 제대로 전하면 회중의 필요에 호소하는 설교를 만들 필요도 없고, 구체적인 적용을 설교자가 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친히 감당하신다는 나이브한 태도로 설교할 수 있다. 상황적 측면과 실존적 측면에 대한 보완이 절실하다. 또한 설교의 논리 전개 방식에 있어서도 귀납적 흐름에서 연역적 흐름으로 진행 나가는 혼합형 같은 것이 선포식 설교의 일방적 태도를 극복할 수 있는 한 제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IV. 결론

이상의 논의들을 통하여 우리는 부흥과 각성 시대의 설교가 현대 설교적 경향에 대하여 어떤 경종을 울려주는지를 살펴보았다. 신설교학의 강력한 태풍 가운데 영향을 받고 있는 현대 설교 사역은 지극히 세속 문화적인 관점을 신학적 반성 없이 수용하고 있다. 이처럼 신학적 관점이 상실된 채 행해지는 세상 문화적 관점의 설교는 기독교 메시지의 본질을 손상시키게 되었기에,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부흥과 각성 시대의 설교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죽기까지 재미를 즐기는 오락주의의 수용으로 점차 퇴색되어 가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설교가 회복되어야 한다. 또한 고객은 언제나 옳다는 소비자 중심주의 정신의 수용으로 퇴색되어가는 케리그마 설교의 회복이 시급하다. 마지막으로 최첨단 기술 문명의 수용으로 테크닉에 의존하는 문화를 추종함으로써 점차 퇴색하고 있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설교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렇게 부흥 시대의 정신을 따라 설교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절대적 우선순위이기는 하지만 이 시대에 청중을 변화시키는 설교적 지혜의 모든 것이 아니다. 상황이 끝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상황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채 추구되어지는 설교 갱신은 반쪽짜리 처방일 뿐이다.

참으로 성경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메시지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에 대한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청교도와 부흥 시대의 유산인 선포식 설교는 오늘까지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왔으며, 교회를 세워내는 주류에 속하는 설교 방식이었다. 하지만 급변하는 시대적 환경의 변화는 전통적 선포식 설교가 업그레이드될 필요성을 제안하고 있다. 새 술을 언제나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한다. 전통적 선포식 설교의 본문 중심성과 신설교학의 청중 중심성, 전통적 선포식 설교의 연역적 접근과 신설교학의 귀납적 접근이 퓨전 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아무쪼록 우리의 설교가 본질에 있어서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고, 형식에 있어서 새로운 설교 사역의 장점을 수용하여 성도를 각성시키는 도구로 쓰여 지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시대 가운데 주의 놀라운 부흥을 경험케 허락하시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하는 부흥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는다. 부흥이 없는 날에도 우리는 부흥 시대의 설교자들처럼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서서 관계를 새롭게 만들고, 세상을 깊게 파악하여 이 세상을 위한 메시지의 형식에 마련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을 것이다. 김 남준 목사의 다짐으로 이 논문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부흥이 오지 않아도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한 편의 설교로 수많은 죄인들을 거꾸러뜨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그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칠 때,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축복이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진리와 양심을 따라 가르칠 것입니다. 커다란 감동을 받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 없어도 우리는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도록 촉구할 것입니다....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울면서 그 일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부흥을 주시면 이룰 수 있는 위대한 결과와 그렇게 수고하여서야 얻을 수 있는 적은 성과 사이의 차이 때문에 우리는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다하여 애써도 변하되지 않는 교회와 세상 때문에, 좋으신 주님을 그렇게 초라하게 섬기는 처지 때문에 흐느끼면서 섬길 것입니다.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하면서.....

The Direction of Contemporary Preaching through Preaching in the Ages of Revivals

abstract

A spirit about preaching required in our days is that of not 'either-or' but 'both-and'. It is very regrettable that opinions to the crisis of preaching have been leaned toward a one-sided way. As John Stott indicated, most preachers have suggested either 'biblical' preaching or 'contemporary' preaching as a diagnosis for the current preaching crisis. Although their views provide a help to solve partially the problems of current preaching, it is still devoid of suggesting an entire way for preaching ministr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uggest an alternative direction for current preaching through the essence and distinctive of preaching in the era of revivals. For this, this paper has chiefly argued about the way of succeeding to the spirit of preaching in the era of revivals. It is the issue of continuity. Preachers should learn great lessons from messages and preachers of the era of revivals. It will be an answer for overcoming the current preaching trend to seeking to entertain crowds rather than building up them as God's people. On the other hand, this paper have dealt with discontinuity between sermon methods of the era of revivals and those of contemporary preaching. The message of the Bible is the same, but ages are totally different. That's why we should modify the forms of our preaching and style of delivery in order to be relevant. It will be an answer for overcoming the preacher-oriented authoritative preaching without considering two-way communication with the audiences of post-modern era. Finally this paper has suggested the way of an alternative sermon in the presupposition that preaching has to do with continuity, an emphasis of old tradition and discontinuity, an emphasis on new ways of thinking.

key word

Preaching, Revival and Preaching, Cognitive style of sermon, The Declarative Sermon. Continuity and Change.

논평

“부흥과 설교; 부흥시대의 설교를 통해 바라본 현대 설교의 미래적 진로”의

발제: 마문철 목사 (Ph. D. 새길교회 담임)

1. 들어가는 말

일전에 교회부흥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 묻는 질문에 ‘설교’라고 대답한 목사들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의 부흥에 설교의 요인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개혁주의 설교학회에서 부흥과 설교에 관한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또한 논평을 맞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설교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설교학 교수님의 논문을 평가한다는 것이 주제 넘는 일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목회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목회적 차원에 논평을 해 보고자 한다.

2. 논문 내용에 대한 평가

논문은 읽고 논자가 발견한 것은 세 가지 면에서 공헌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선지자적 현실에 대한 통찰력과 개혁신학의 핵심 가치인 지속적인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과 창의적인 대안 제시이다.

가. 선지자적 통찰력

선지자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만약 선지자들의 율법의 정신을 바로 이해하고 전달하는 일을 잘 했으면 선지자의 역할이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은 백성들의 이상적인 상태를 위하여 제정되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이러한 이상적인 상태 속에서 율법이 제사장들에 의해 제시될 때에 그 가르침을 따를 수 있었다. 만일 백성들이 그렇게 했더라면, 개혁가가 나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제사장들이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지고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개혁을 통해서 종교적인 생명력을 회복하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타파하기 위해서 개혁가들인 선지자들이 나타났다. 우리 시대에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모두 목사라는 칭호로 불리워지지만 목사들 가운데 분명히 선지자적 사명을 지난 사람들이 있다. 제사장적 사명을 맡은 사람들은 일반목회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들이다. 그러나 사역의 관점에서 따지자면 제사장들은 목회자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하는 목회자들이 종교적인 형식주의에 빠지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 때 그들을 향하여 개혁의 목소리를 내야 할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사람은 누구인가? 신학교 교수가 이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이스라엘 선지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엘리야와 엘리사는 모두 선지학교 교장들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신학교에서 설교학 교수로서 미래의 목회자들인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이우제 교수의 “부흥시대 설교를 통해 바라본 설교의 미래적 진로”라는 글은 선지자로서 종교적인 형식주의와 세속적인 가치관에 몰입되어 있는 제사장들인 목회자들을 향한 선지자의 목소리이다. 한국강단의 설교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부흥시대 설교자들의 설교원리를 제시한다.

첫째, 한국교회의 재미를 추구하는 설교의 문제의 대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설교를 제안한다.

이우제 교수는 현대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를 설교자들이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를 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들의 요구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 논평자도 이런 설교의 문제점을 경험한 바 있다. 코미디언 식으로 자극적인 언어와 괴상한 행동을 하면서 설교를 하고 방송국에도 등장하는 설교자가 있는데 교회에 나오지 않지만 이 분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더러 만나본다. 그런데 그 설교를 재미있게 듣기는 하지만 회심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신자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한국교회의 강단에 가장 문제점 중 하나는 사람의 욕구를 채워주고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이우제 교수의 주장은 공감하는 바이다.

이우제 교수는 이런 한 경향의 원인을 두 가지에서 찾는다.

한 가지는 긍정적 차원에서 설교자들이 청중들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열심히 지나쳐서 생긴 병폐라고 말한다. 청중에게 잘 들리게 하려는 의도는 있지만 오락성이 있는 방법이 메시지를 압도한다.

다른 한 가지는 현대 문화를 너무 비판없이 수용하는데서 생기는 문제라고 진단한다. “현대인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늘 새로운 재밋거리를 찾아다니고 있다.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재미있는 일로 자신의 삶을 채워야 하는 오락욕구에 중독되어 있다.” 이러한 욕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려야할 것이다. 그런데 설교자들이 현대인들의 이러한 욕구에 편승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가고 있다.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이우제 교수는 부흥시대의 설교자들의 설교를 제시한다. 부흥시대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중심적인 설교였으면 회심을 통한 삶의 변화를 추구했다

부흥시대 설교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설교는 사변적이고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회개를 통한 회중의 회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현대 설교가 세상 문화의 정신을 따라 삶을 즐기는 사람을 더 즐겁게 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위대한 부흥시대는 사람을 진정한 회심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세우고 또 다시 하나님 앞에 세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추구한다.

둘째 한국교의 문제는 소비자 중심의 설교의 문제점과 대안으로 케리그마적 설교를 제시한다. 현대 상업주의가 교회에 들어오면서 교회는 교인들을 소비자로 보고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현대설교학은 어찌 보면 바로 이 소비자 문화에 사는 청중들에게 호소하는 실용적이고 필요중심의 설교의 길을 제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마케팅 전략의 영향력 아래서, 복음은 생산품으로 여겨지고, 설교자는 생산자로 회중은 소비자로 취급하고 있다.” 이러한 상업주의적인 사고는 설교에서 케리그마의 요소의 약화내지는 제거로 나타났고 교훈 중심적 설교로 전락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포하는 케리그마는 사라지고 사람들에게 도덕적 훈계와 인간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경향에 한 대안으로 부흥시대 설교자들에게서 찾는다. 그들은 영혼의 구원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복음적 메시지에 집중했다. “부흥과 각성의 시대의 설교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회중의 개인적인 선호도로 메시지를 구매할 수 있는 소비자로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회심이 필요한 개종자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회중들의 개종을 위해 필요한 메시지는 사용자에게 편리한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케리그마의 선포에 있다.”

셋째, 한국교회 설교의 문제를 과도한 테크닉의 의존을 말하고 대안으로 성령의 주권적 사역을 제시한다.

이우제 교수는 부흥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가능하다는 찰스 피니의 부흥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에드워드의 하나님 주권적인 부흥을 옹호한다. 오늘 한국 교회는 마치 교회를 회사를 경영하는 것과 같이 치밀한 인간주도적인 부흥을 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 영혼의 가치는 무시되고 통계 숫자만 사랑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역시 부흥시대 설교자들의 설교를 제시한다.

마크 쇼는 에드워드가 말하는 부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진정한 부흥이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에 대한 관념을 회복시키는 성령의 주권적 기름 부으심이다.”

나. 복음을 전하는 방법의 지속적인 개혁의 필요성 강조와 대안제시

이 글에서 필자는 현대한국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대안으로 부흥시대의 설교자들의 신학과 설교를 제시하지만 이것은 역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형식과 언어로 개선되어야 할 것을 지적함으로 개혁주의의 핵심 가치인 지속적인 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 한국강단의 설교를 부흥시대의 설교자들의 설교와 비교한 필자는 또한 부흥시대의 설교가 이 시대에 바로 대입할 수 있는 공식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신학의 사명은 새로운 시대에 맞게 진리를 진술해야 한다. 복음주의 신학자 맥그래스는 “기독교의 언어는 역사적 발전에 따라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외적인 기준에 비추어서 개선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우제 교수는 설교학에서 이러한 신학적 사명을 어떻게 성취해 나갈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것은 신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흥시대의 설교가 우리 시대 한국강단을 치료하는데 마땅한 대안이지만 과거의 그대로를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개선의 방향과 개선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진실로 요구되는 것은 부흥시대의 설교자들에게 대한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정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정신과 대화에 있다.”

계승해야 할 유산으로 그들이 전하는 복음적인 메시지의 내용이고 개선해야 할 것은 설교의 형식의 전환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흥시대의 설교자들의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과 설교는 인간중심적인 신학이 난무하는 시대에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 형식에 변화를 꾀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과거부흥시대 설교자들의 설교를 ‘선포식’설교라고 말하며 이 형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를 “이성적 논증으로 분명한 논지를 설명하는 강력한 삶의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로 정의하고 싶다. 이것을 보다 세분해서 설명하면 선포식 설교는 1)명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설교 2)이성에 호소하는 설교 3)강력한 삶의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설교를 현대 신설교학적 차원에서 비판하고 있다. 설교자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강력하게 하향식으로 선포하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성경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와 회중을 정당한 설교의 파트너로 고려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 신설교학에서 강조하는 청중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성경적인 권위를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우려를 말했는데 이제 또한 설교자 중심의 설교를 청중중심의 현대설교학적 차원에서 조명하고 있다. 신학과 설교가 끝없이 개혁의 길을 가야 할 것을 강조하는 개혁신학의 원리를 설교학에 잘 적용하고 있다.

다. 창의적인 대안 제시

이 글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통적인 부흥시대의 설교자의 장점과 이 시대의 신설교학의 조화를 통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부흥 설교자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신설교학적인 차원에서 대안을 제시한다. 먼저 신설교학적 차원에서 부흥시대 설교자들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부흥시대의 설교가 설교를 들어야 하는 청중들의 논 높이를 맞추지 못하고 청중들의 설교에 참여시키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청중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맡기고 청중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 줄 것이라는 식의 신설교학의 문제 역시 간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과 성경의 권위로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특징이 있는데 설교에서 분명한 명제적인 진리를 제시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전하는 신설교학의 특징을 문제로 지적한다. 청중의 상황을 소홀히 하고 성경의 권위에 의지하여서 선포하는 부흥시대의 설교와 지나치게 청중을 강조한 나머지 복음의 선포적 기능을 간과한 신설교학과의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제시한다. 양자의 약점은 극복하고 장점을 최대화 하는 방법으로 ‘성육신적인 설교’라는 창조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성육신적인 설교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전통적인 선포식 설교를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통합적 정신을 구현하는 설교 형식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필자가 제시하고 싶은 설교의 방식은 청중을 심도 있게 고려하면서도 본문의 음성을 담아낼 수 있는 성육신적 모델이다. 기본적으로 성육신은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해 허리를 굽히신 사건이다. 성육신의 신비 가운데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가 함께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게 된다.

3. 논문에 대한 제언

이우제 교수의 “부흥과 설교”라는 소논문은 선지적 통찰력으로 한국의 강단을 조명하고 부흥시대의 신학으로 대안을 찾지만 지속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대안을 성육신적인 설교라는 창의적인 방법으로 제시한다. 신학교 교수로서 선시자적 통찰력과 개혁주의 설교라는 주제에 맞게 개혁을 강조한다. 변할 수 없는 원리를 담아내는 그릇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 그릇을 빚어냈다는 점에서 이 시대 설교자들과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경청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우제 교수의 위는 논지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여기에 조금 더 욕심을 내서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강단의 설교자들의 병폐라고 볼 수 있는 청중을 소비자로 보고 청중의 욕구를 채우려는 경향과 신설교학자들이 설교에서 청중심의 설교를 추구한 것은 양자가 청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양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전자는 청중들을 건물을 확장하고 통계숫자를 늘리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경향이 많다. 청중들의 구미에 맞추어서 더 많은 청중들을 모으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러나 신설교학자들은 듣지 않은 청중들이 잘 듣게 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듣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설교이다. 그런데 이우제교수의 논문에서 이 차이를 분명히 언급하지 않아서 청중의 입맛에 맞추려는 설교와 청중을 듣게 하고 청중의 책임을 강조하는 신설교학의 차이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둘이 같은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째, 잘못된 설교신학과 방법이 한국교회 강단에 난립하게 된 원인인 부흥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명확하게 제시했으면 한다. 한국교회 강단의 병폐로 지적한 인간중심주의와 오락주의 지나친 테크닉을 추구하게 된 배경이 되는 부흥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글 흐름에서 건전한 부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만 한국교회의 건물의 확장과 통계숫자의 증가를 부흥으로 보는 잘못된 관점에 대해서도 조금 심도 있게 언급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셋째, 세 번째 것은 비평이라기보다는 설교학자로서 앞으로 한국교회에 더 큰 기여를 해주기를 바라는 바램이다. ‘설교의 성육신화’는 발제자의 창의적인 대안인데 이 이론을 좀 더 구체화시켜서 직접 설교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되는 지 방법론까지 연구해서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4. 나오는 말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만 하다 보면 자칫 잘못하면 책상 앞에서 하는 사변적인 연구가 되기 쉬운데 이우제 교수님의 글은 한국교회 설교현장의 문제를 잘 조명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글이다. 한국교회 강단이 지속적으로 개혁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설교학자로서 사명을 잘 감당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논문의 평가를 맡겨주신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이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개인주의 설교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

Community-Shaping Preaching as an alternative of Individualistic Preaching

발제: 이승진 교수(Th. D. 실천신학대학원)

논평: 오현철 교수(Ph. D. 성결대학)

발제자: 이승진 교수

합동신학대학원 (M. Div)

Stellenbosch Univ. (Th. M & Th. D, 설교학)

현, 실천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

논평자: 오현철 교수

연세대학교 (B.Sc./B.A.)

성결대학교 (B.Th.)

Canadian Theological Seminary (M.Div.)

평택대학교 대학원 (Th.M. 실천신학)

University of Pretoria (Ph.D. 설교학)

현, 성결대학교 설교학 교수

개인주의 설교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

Community-Shaping Preaching as an alternative of Individualistic Preaching

발제: 이승진 교수(Th. D. 실천신학대학원)

서론

설교(說敎)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이 땅에서 그 뜻대로 살아가는 회중들의 모임으로서의 신앙 공동체를 세움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구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될 때 나타나는 바람직한 가시적 결과물이 바로 변화된 회중 공동체이다(롬 12:1). 하지만 한국교회의 설교는 회중의 변화와 공동체의 성숙을 충분히 이끌어내고 있는가? 혹시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10년을 설교해도 변화되지 않는 성도들 때문에 낙심하지는 않는가? 만일에 설교 사역이 회중의 변화와 신앙 공동체의 성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고 이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본고에서는 계몽주의의 영향 하에 있던 전통적인 설교와 기존의 설교학적 전략이 지나치게 개인주의 설교에 머물면서 신앙 공동체 전체의 변화와 성숙을 이끌어내지 못했음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개인의 선택과 결단에 머물렀던 근대적인 개인주의 설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대안으로서 공동체적인 설교와 이를 위한 설교적 전략을 모색하고자 한다.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의 대안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먼저는 현재 한국교회 설교 사역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또 한국교회 내에 자리하고 있는 개인주의 설교의 발흥 원인과 그로 말미암은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개인주의 설교에 대한 현실 인식을 정리한 다음에는 설교의 중요한 목표로서의 ‘신앙 공동체 세우기’를 위한 신학적인 근거와 목회적인 방안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서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먼저 설교자는 어떤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서 설교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교신학적인 입장을 정리할 것이다. 이어서 신앙 공동체 세우기를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서의 내러티브의 역할과 가치를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를 위한 구체적인 설교 전략들을 제시함으로써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의 실제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1. 설교학의 강조점의 변화

컬럼비아신학대학원(Columbia Theological Seminary)의 설교학자 루시 로즈(Lucy Rose)는 설교의 목적과 내용, 그리고 방법의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2천년 설교학의 변화를 ‘전통적인 설교학(traditional homiletics) - 케리그마 설교학(kerygmatic homiletics) - 변혁적 설교학(transformational homiletics)’의 3단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추적하고 기존 설교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대화 설교(conversational preaching)를 제시하고 있다. 로즈의 분류에 의하면 3단계로 발전해 온 설교학의 조류에서 그 첫번째 설교학은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 C. E.)이 일반 수사학을 기독교 설교에 접목시킨 이래로부터 1870년에 출간된 존 브로더스(John Broadus)의 『설교 준비와 전달』(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s)에서 발견되는 전통적인 설교학(traditional homiletics)이다. 전통적인 설교학의 중요한 강조점은 하나님의 말씀 대언자로서의 설교자의 권위, 청중에 대한 논리적인 설득, 명제문으로 압축되는 설교의 핵심사상, 연역적이고 추론적인 3대지의 설교 형식, 이를 통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확신의 자리로 청중을 인도하기, 설교 청취 과정에서의 청중의 수동성과 같은 것들이다.

두번째 케리그마 설교학(kerygmatic homiletics)은 복음서의 핵심적인 케리그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저명한 신약학자 C. H. 다드(Dodd)와 말씀의 신학자로 잘 알려진 칼 바르트(Karl Barth)로부터 이론적인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 설교의 내용과 목표, 그리고 방법의 관점에서 전통적인 설교학과 일부 중첩되는 면이 있지만, 케리그마 설교학의 중요한 목표는, (전통적인 설교학의 내용으로 강조된) 명제적 진리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으로서의 케리그마를 선포함으로 회중이 단순히 명제적인 진리를 이해하는 차원을 능가하여 설교 현장에 하나님이 직접 임재하시어 말씀 사건(Word Event)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케리그마 설교학에서 염두에 두는 설교의 언어는 단순히 설교 메시지의 전달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구원 활동을 중재하는 매개체로 격상된다.

한편 첫째 설교학과 둘째 설교학의 약점이 지나치게 설교자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 시대에 지나치게 설교자의 권위만을 극대화하여 결국 설교자와 회중 간의 인격적 분리를 초래하면서 말씀을 통한 인격적 변화와 성숙을 이끌어내는데 미흡했다는 반성이 제기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70년대 초반부터 등장한 것이 바로 신 설교학 운동(New Homiletic Movement)이다. 신 설교학 운동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가 용이하지 않지만 설교학자 폴 윌슨(Paul S. Wilson)은 최근 설교학의 ‘새로운 대열’에 합류한 설교학자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악트마이어(Elizabeth Achtemeier)와 찰스 바토우(Charles Bartow), 프레드릭 뷔크너(Frederick Buechner), 데이빗 버트릭(David Buttrick), 프레드 크래독(Fred B. Craddock), 그레디 데이비스(Grady Davis), 유진 로우리(Eugene L. Lowry), 모리스 니덴달(Morris J. Niedenthal), 찰스 라이스(Charles L. Rice), 에드먼드 스테임믈(Edmund Steimle), 토마스 트로이거(Thomas H. Troeger), 로버트 와즈넥(Robert Waznak)과 같은 학자들의 저서들에서 설교학의 관점들이 새로운 경향을 중심으로 분명하게 수렴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크래독의 귀납적 설교(inductive preaching)로부터 유진 로우리의 내러티브 설교(narrative preaching), 찰스 라이스나 에드먼드 스테임블의 이야기 설교(storytelling sermon), 그리고 데이빗 버트릭의 현상학적 설교(phenomenological preaching)를 관통하는 중요한 관심사가 바로 ‘청중의 자발적인 청취를 가능케 하는 메시지 전달 방법’이다. 신설교학 운동이 도래하면서 설교의 강조점이 설교자의 인격적 설득이나 성경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분명한 뜻에 대한 선포로부터 청중의 실존적인 문제(설교 주제)나 청중의 경험(설교의 목표), 청중의 효과적인 설득을 위한 귀납적 형식이나 내러티브 형식(설교의 방법)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면 1971년 프레드 크래독의 『권위 없는 자로서』(As One Without Authority)가 등장한 이후 전통적인 설교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신설교학 운동이 설교학계와 강단에 소개되고 도입된 결과는 어떠한가? 과연 신설교학 운동은 무기력한 강단과 변화 없는 회중석에 변화의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90년대 후반 들어 데이비드 버트릭(David Buttrick, 1987)을 비롯하여 존 맥클루어(John McClure, 1995), 찰스 켐벨(Charles Campbell, 1997), 루시 로즈(Lucy Rose, 1997)와 같은 여러 설교학자들과 신학자들[스텐리 하워와스(Stanley Hauerewas)나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은 신설교학운동에서 발견되는 개인주의 설교의 폐해를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공동체적인 설교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설교학의 일반적인 경향을 압축한다면, 신설교학 운동으로 말미암아 말씀사건이 발생하는데 동원되는 권위와 리더십 그리고 권력(power)의 중심축이 설교자에게서 또는 성경으로부터 개인 청중(individual audience)에게로 이동하였고, 다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설교의 목표를 개인 청중의 심리적 각성이나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신앙 공동체 세우기’와 아울러 이를 위한 설교학적인 근거로서의 성경 내러티브를 재조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90년대 중반 한국교회에 유진 로우리의 『이야기식 설교구성』(The Homiletical Plot)과 내러티브 설교론(narrative preaching)이 소개된 이후 신설교학운동이 제시한 설교 방법이 한국교회 강단에 완전히 뿌리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신설교학운동의 개인주의설교와 그 한계,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community-shaping sermon)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일견 일선 설교자들의 관심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따라서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에 대한 논의 이전에 먼저 개인주의 설교의 실상과 그 원인,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폐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개인주의 설교의 실상

개인주의 설교(individualistic preaching)란 설교의 목표가 설교 메시지에 대한 회중 전체의 공동체적인 반응을 의도하지 않고 신자 개개인의 지적인 이해와 내면적인 결단의 단계에 머무르기 때문에 청중의 지적인 이해와 정서적인 결단이 실제 행동의 변화와 공동체 전체의 윤리적인 성숙과 헌신으로 이어지지 않는 설교를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설교 사역이 ‘신앙 공동체 세우기’와 거리가 먼 개인주의 설교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2007년 4월 『목회와 신학』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들 578명을 대상으로 설교 사역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통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설교가 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무려 98.3%의 목회자들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하고 있다. 이런 통계를 볼 때나 또는 강단에 선 설교자의 심정을 떠올려 보면, 거의 대부분의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 사역이 공동체의 성장과 성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잘 이해하고 있어 보인다. 하지만 공동체의 성장을 지향한다는 한국교회 설교가 과연 유기적 연합체로서의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서로 분리된 개인들의 집합체에 머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설교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가 주로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공동체 지향적인 설교와 거리가 먼 개인주의적인 설교에 치우쳐 있다는 증거는 설교의 목적과 설교 메시지에서 강조되는 하나님의 이미지, 설교에서 청중의 역할, 설교자의 역할, 설교 방법, 그리고 설교의 적용점 등등을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① 공동체적 설교와 개인주의적인 설교를 구분하는 첫번째 기준은, 설교자가 추구하는 설교의 목적이다. 설교의 목적이나 목표가 교회 회중 전체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체적인 문제점에 집중하면서 그 목표를 향한 공동의 실천적인 대안과 전략을 제시하면 공동체적인 설교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신자 개인 사이에 발생한 인지적 혹은 심리적 문제점(특정 교리에 대한 오해나 무지를 해결하려거나, 개인 내면의 절망과 불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개별적으로 해결하는데 집중하면서 개인 내면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확신과 결단의 방향만을 제공하는데 머무른다면 이는 개인주의 설교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설교의 목적은 이미 설교의 서론에서도 충분히 암시된다. 공동체적인 설교라면 서론에서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함께 직면한 여차 여차한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라거나 “이런 문제점에 직면한 우리 공동체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라는 식의 공동체적인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서론을 시작할 것이다. 반면에 개인주의적인 설교의 목적은 주로 신자 개개인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집중된다. 그래서 설교 서론에서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라는 식의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내면의 갈등이나 불확실성의 문제를 제시할 것이다.

② 설교에서 강조되는 하나님의 모습이나 이미지 역시 중요한 분별 기준이다. 신자 개개인의 삶 속에 개인적으로 찾아오시고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심리적인 문제들을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모습으로서의 하나님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면 이는 다분히 개인주의 설교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반대로 신앙 공동체 전체의 사역과 모임 속에 임재하면서 공동체가 현재 당면한 문제점들을 단계적으로 해결하는 주체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면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로 평가할 수 있다.

③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신자의 역할도 개인주의 설교와 공동체 설교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개인주의 설교에서 하나님과 신자 개개인과의 만남이나 경험을 위해서는 신자 개개인의 결단과 헌신이 강조된다. 그래서 강한 결단과 뜨거운 헌신을 보이는 신자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설교의 최상위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인본주의적인 신앙이 강조된다. ‘당신의 선택과 결단 여부에 의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공동체적인 설교에서 하나님과 신자와의 만남은, 신앙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와 수고를 통하여 계속 진행되는 기독교적인 내러티브(Christian narrative)의 매개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 객관적인 구원사로 압축되는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말씀은 (초월하신) 하나님과 (특정한 시대에 속한 특정) 신앙 공동체를 매개하는 매개체 역할을 감당한다. 양자 간의 만남에 객관적인 구원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이 특정 공동체 안에서 계속될 것을 추구하는 설교라면 설교에서도 신자 개개인의 인본주의적인 결단보다는 성경에 천명된 하나님의 구원에 먼저 주목할 것이다.

④ 설교자의 역할도 두 가지 설교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개인주의 설교에서 설교자의 일차적인 역할은 신자 개개인의 내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상담가나 지적인 통찰을 제공하는 교사로 간주된다. 반면에 공동체적인 설교에서는 공동체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의 뜻이 실제로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도록 영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도자(leader)의 역할이 강조된다.

⑤ 청중의 변화에 대한 설교의 전략에서도 공동체적인 설교는 장기적인 변화를 염두에 두고서 연속 설교에 집중하는 반면에, 개인주의적인 설교의 주제나 강조점은 한 신자 개인이 한 주간을 영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영적 교훈이나 통찰을 단기적으로 제공하는데 집중한다. 말하자면 장기적인 연간 설교 계획을 가지고 공동체의 성장과 변화를 단계적으로 의도하면서 설교 메시지가 전해지고 있느냐, 아니면 신자 개개인이 개별적으로 각자의 삶 속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영적 교훈을 단회적으로 제시하느냐의 차이로도 공동체적 설교와 개인주의적 설교를 구분할 수 있다.

⑥ 설교의 적용점 역시 판단 기준이다. 공동체적인 설교는 설교를 듣는 전체 회중이 공동체적으로 함께 감당하고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목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적용점들(ex. 오늘부터 진행되는 지역봉사 활동에 함께 참여하시기 바랍니다)을 제시하는데 집중할 것이다. 반면에, 개인주의적인 설교의 적용점은 구체적인 적용점이 언급되지 않거나 설령 언급되더라도 세부적인 적용과 실천은 개개인의 사적인 선택의 문제로 남겨진다(ex 더욱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3. 개인주의 설교의 유래

1) 인문주의의 발흥으로 말미암은 개인주의

교회 안에 개인주의적 설교가 팽배해진 원인으로 근대 이후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의 발흥과 같은 시대사조의 영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구 문명사에서 중세 이전까지만 해도 한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과 자연에 대하여 이차적인 위치에 있었다. 인간의 가치도 스스로의 생래적인 가치와 한 개인의 존엄성에서 확보되지 못하고 세상을 창조하시며 그 주인되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세 시대 이후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신본주의적인 인간이해에 변화가 시작되고 한 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운동은 특히 고대의 인문주의 작품을 재발견되고 예술이 신학의 시녀의 자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예술 고유의 역할을 획득하게 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르네상스 운동이 지속되면서 신학과 교회의 중요성이 깡그리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신학과 교회의 역할은 점차 부상하는 인간과 인간 세계를 더욱 돋보이도록 하는 무대 배경의 자리로 점차 밀려나게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개인주의가 발흥하게 되는 문예사적인 조류를 추적하는 데이비드 헨더슨(David W. Henderson)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르네상스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대변하는 경향을 탄생시켰다. 서로 연관되거나 총체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개개인의 남녀가 그들을 창조한 존재와는 독립된 그 자체로서 좋은, 존엄한 존재로 여겨졌다. 르네상스 이후로 가장 중요시된 것은 하나님이나 공동체보다는 개인들이었다.

르네상스 운동에 이어 계몽주의 시대가 열리자 그동안 르네상스 운동으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한 인본주의가 시대적으로 만개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가치를 인정받는 자리에서 벗어나서, 한 개인의 생래적인 가치와 목적을 발휘하는 존재로 탈바꿈하였다. 한 개인의 선택과 결단을 중시하는 가치관은 자연히 교회의 설교에서도 공동체 전체의 구원보다는 한 개인의 구원과 이를 위한 한 개인의 올바른 분별력과 선택, 결단과 같은 심리 기제를 강조하게 되었다.

2) 종교의 세속화에 따른 사사화

근대 이후 개인주의 설교가 심화된 또 다른 원인으로 종교의 세속화와 사사화 현상을 지목할 수 있다. 종교의 세속화와 그에 따른 사사화에 대하여 예리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회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피터 버거(Peter Berger)이다. 버거는 세속화를 “사회 및 문화의 어떤 영역이 종교의 제도와 상징체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즉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사회 전체나 공동체 전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공동체 전체가 함께 선택하고 해결해야 할 공공의 이슈나 과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일상적이고 사적인 영역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종교가 사회적인 구속력과 영향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그나마 살아남은 종교는 이제 개개인이 마치 기호식품을 선택하듯이 자신에게 설득력 있어 보이는 - 또는 자기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되는 - 개개인의 설득력 구조를 취사선택하는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버거에 따르면 이러한 사적인 종교는 한 개인에게는 아무리 실재적이라 하더라도, 예전에 기독교 국가 체계(Christendom) 아래에서 기존 종교가 영향력을 행사해온 방식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력을 행사하고 모든 사회 생활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럼으로써 공통의 세계를 구성하는 과업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종교가 공공의 영역에서 밀려나 사적인 영역으로 위축되고 신앙생활 역시 공동의 사안이 아니라 한 개인의 취사선택의 문제로 변질된 상황에서, 기독교의 설교 역시 이러한 추세에 편승하여 공동체적인 설교보다는 개인주의적인 설교 메시지를 전할 수 밖에 없다.

3) 종교 시장과 메시지의 상업화

종교와 신앙생활이 공공의 영역에서 한 개인의 선택문제로 전락한 상황에서 교회의 성장과 침체는 교회의 메시지가 개인에게 최대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탈바꿈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피터 버거의 분석에 의하면 중세시대 기독교 국가체계(Christendom) 지배하에서 정치 경제 사회 전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신중심적인 세계관이 무너진 이후에 다양한 가치관과 세계관이 공존하는 종교 다원주의적인 문화 상황이 초래되고 이런 상황에서 종교는 자연히 다른 종교나 가치관들과 경쟁하는 시장 상황을 야기시켰다고 한다. 종교 시장의 상황에 노출된 다양한 종교들이 본래의 가치관과 질서를 우선시하지 않고 소비자들의 기호에 부응하려는 전략을 중시하는 모습은 비단 현대 미국만의 종교 현상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 노치준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다종교 사회, 즉 국가나 문화의 배타적인 지원이 전무한 다종교사회의 시장 속에서 적응하여 살아남으려고 하다보니 자연히 복음보다는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여 복음의 정신이 훼손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종교 시장에서 메시지가 상업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설교 메시지를 소비하는 청중에 대한 심리적인 접근 방법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개인주의가 팽배해진 원인을 추적하는 데이비드 헨더슨은 서구 세계를 자기도취적인 개인주의에 빠지게 만든 마지막 요인으로서 20세기에 발흥한 심리학적인 자존감 운동을 지목한다.

2차 대전 이후에 낭만주의 열풍을 타고, 에이브러햄 마슬로우(Abraham Maslow), 칼 로저스(Carl Rogert), 에릭 프롬(Erich Fromm), 롤로 메이(Rollo May)와 같은 심리학자들은 상담에 있어서 새로운 접근법을 발전시켰다. 이런 형태의 치료법은 무엇보다도 먼저 피상담자의 자존감을 세워 주는 데 관심을 두었다.... 이들 심리학자들이 강조하는 요점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사실과 스스로의 성장과 치료에 필요한 모든 것이 내면에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는 데 있다.

20세기 심리학 운동에서는 나의 필요가 곧 나를 규정해주며 내가 살아가는 이유도 나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함이다. 한 개인의 삶의 이유와 목표에 하나님이나 공동체가 끼어들 틈이 없다. 행복도 나의 필요가 충족되었을 때 행복한 것이며 결국 그 개인적인 행복이 삶의 모든 의미를 좌우하게 되었다. 결국 르네상스의 낙관주의와 계몽주의로부터 파생된 하나님의 이미지도 전체 공동체와 인류 역사의 주인공으로서의 하나님에서 한 개인의 하나님으로 전락했다가 20세기 심리학 운동의 여파로 인하여 이제는 한 개인의 필요와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종의 이미지로 더욱 추락하고 말았다. 이상으로 개인주의 설교의 원인으로 인문주의와 종교의 세속화와 사사화, 그리고 종교 메시지의 상업화를 지목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설교로 말미암은 부정적인 결과는 무엇일까?

4. 개인주의 설교의 폐해

개인주의적 설교에서 비롯되는 대표적인 폐해로는 먼저 복음의 사사화(私事化)와, 둘째로 실천적인 순종과 변화를 무시하는 무율법주의적 신앙생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속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육체적 현실을 천시하는 영지주의적 영성을 지목할 수 있다.

① 개인주의적 설교로 말미암은 대표적인 폐해는 먼저 복음의 사사화를 지목할 수 있다. 복음의 사사화(私事化, 혹은 사유화, 私有化 privatization of the Gospel)란 복음의 효력이 미치는 파장을 인류 역사와 전 우주의 공동체적 구원과 변혁까지 확장시키지 않고 한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더 효과적인 설득력 구조 하나를 선택하고 더 효과적인 심리적 기제 하나는 소비하는 개인의 선택 문제로 국한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복음이 사사화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의도했던 성부 하나님의 통전적 구원과 그 통전적 구원의 가시적인 증표들인 공동체 전체의 성숙과 변화나 공동체적 윤리, 그리고 신자의 사회적인 책임은 결코 기대할 수 없다. 사사화된 복음은 신자를 사회적인 존재로 간주하지도 않고 자신의 영적 신분과 영향력을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표현하도록 유도하지도 않으며,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표현되지 않은 영성에 대해서도 문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사사화된 복음이 지배하는 강단에서는 비록 회개와 구원이 선포되더라도 그 회개와 구원은 철저히 신자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며, 설령 선택하더라도 그 신앙은 내면적 각성이나 체험에 집중될 뿐, 교회가 속한 지역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어떻게 회개한 신자다운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렇게 복음의 사사화가 심화되면 자연히 설교 메시지의 사사화가 이어진다. 루돌프 보렌에 의하면 설교 청취는 개인의 사적인 사안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사안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회중과의 연합과 사귐이 없이는 성령과의 사귐도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다”. “성령 하나님은 공동체에게 약속된 것이며 혼자만의 내적인 빛의 도움이나 혼자만의 결정으로 성령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살 수 없고, 다만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만이 성령과 말씀의 인도를 따라 살 수 있다. 하지만 설교 메시지에 대한 반응의 문제가 개개인에게 일임되어버린다면 결국 말씀을 통한 성령의 올바른 인도 역시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서 헌신에 대해서 설교하면 설교를 들은 회중 중에서 믿음이 좋은 신자들은 설교 메시지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여서 개인적으로 헌신을 표현할 수 있지만, 다른 신자들은 그렇지 않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마치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경제체제하에서 열심히 일을 해서 재물을 많이 소유하든 다 소비하든 소득과 소비의 문제는 개인의 자유에 맡겨진 것처럼, 설교 메시지를 수용하고 반응하는 문제도 신자 개개인의 사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강단에서 헌신을 외치지만 신자의 입장에서는 각자 형편에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신자들에게 헌신을 표현해야 할 부담감도 없고, 또 그 설교에 대한 반응으로서 공동체 전체가 지역 사회를 섬기는 가운데 헌신을 집단적으로 표현해야 할 부담감도 없다. 설교 메시지가 사사화된 상황에서 설교 메시지의 수용과 반응은, 공동체의 집단적인 연대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신자 개개인의 사적인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② 설교 메시지가 사사화됨으로 말미암은 두번째 폐해로는 무율법주의적인 신앙을 지적할 수 있다. 개인주의 설교에서 메시지에 대한 청중의 반응이 신자 개개인의 선택사항으로 밀려나면, 설교 메시지의 적용점을 실천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그만큼 약해 질 수 밖에 없다. 메시지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순종과 실천이 개인적인 선택과 결단에만 내맡겨지고 공동체적인 상호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개인 혼자서 메시지를 이해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혼자서 실천적인 순종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개인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감동적인 설교를 듣더라도 모두가 가만히 있는 상황에서 자기 혼자서 이러 저러한 실천을 감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설교가 실제적인 변화와 순종과 밀접하게 연결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면,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는 실천적인 변화와 실행적인 적용점을 배제하고 주로 지성적인 이해를 강조하는 설교를 전하고 듣는 방향으로 암묵적인 동의가 이뤄진다. 설교와 기독교 교육이 실천과 순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면, 결국 교회 안에는 “실천과 순종을 의도하지 않는” 변종 목회가 등장한다. 그리고 행동하지 않는 신자들을 계속 교회 안에 붙잡아 두기 위한 대안으로서 지성적이거나 감성적인 메시지가 등장하게 되고, 결국 신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 기호에 부합하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소비하는 종교 소비자로 전락하고 만다.

설교 현장에서 설교자들이 느끼는 당혹감은 신자들이 아무리 설교를 오래 듣더라도 실제적인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를 듣고 신자들이 영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현상에 대해서 불평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신자의 실제적인 변화를 뒷받침하는 공동체적 개입과 공동체적 참여와 지원에 대해서 설교자는 어떤 입장과 전략을 갖고 있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구원은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이며, 설교 메시지에 대한 반응과 영적 변화와 성숙의 문제 역시 개인적인 결단과 아울러 공동체적인 상호 지원과 참여와 견제를 필요로 한다. 개인적인 결단이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 과정을 유도하고 지원하는 공동체적인 참여와 공동체적인 연대책임이 필요하다. 공동체적인 참여와 지원이 없는 개인적인 결단은 찰나적인 각성으로 끝나리기 쉽다. 설교에 영적 변화와 성숙이 뒤따르지 않는 일이 반복되면, 자연히 신앙은 이성과 행위가 분리되고 무율법주의적인 신앙의 잡초가 교회 정원을 뒤덮고 말 것이다.

③ 개인주의적 설교가 반복될 때 나타나는 마지막 폐해로서 성속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육체적 현실을 천시하는 영지주의적 영성을 지목할 수 있다. 현대 미국 교회의 설교를 비평적으로 성찰하는 데이비드 버트릭에 따르면 개인주의적 설교는 세계 없는 자아(a self-without-a-world)를 추구하는 반면에 또 다른 극단에서 사회복음의 설교(social gospel preaching)는 자아 없는 세계(a world-without-a-self)를 추구한다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설교 모두 - 나름대로 설교를 듣는 청중과의 적실성을 추구하더라도 - 결국은 비현실적인 설교(unrealistic preaching)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설교를 듣는 한 인격체는 그가 속한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세상 역시 한 인격체와 분리된 체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버트릭에 의하면 개인주의적 설교는 설교자의 선호도의 차원에서 평가할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효력의 차원에서 평가해야 할 기독론적인 문제라고 한다. 말하자면 개인주의적 설교 속에는 우주적 포괄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 개인의 구세주(a personal savior)로 평가절하시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적인 악으로부터의 개인적인 구원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악으로부터의 사회적 구원을 포함하며 우주적인 악으로부터의 우주적인 구원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강단에서 개인주의적 설교가 심화될 때 신자가 떠올리는 악은 사회적 악이나 우주적 악과 무관한 한 개인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죄악들뿐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설교로부터 기대하는 구원의 완성 역시 그저 한 개인의 구원에 불과할 뿐이고 사회적인 악과 악한 정세와 권세로부터의 우주적 구원은 전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버트릭에 의하면 개인주의적 설교는 영육간의 극단적 이원론을 견지하면서 한 인간이 처한 사회적 현실을 부인하고 피안적인 세계로의 은밀한 구원을 추구했던 영지주의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상으로 현대 설교학계와 강단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개인주의 설교의 실상과 그 원인,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부정적인 폐해들을 살펴보았다. 개인주의 설교가 이렇게 심각하다면 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설교의 중요한 목표인 신앙 공동체에 대한 교회론의 토대를 올바로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사역에 설교가 관여한다면 어떻게 관여하는지에 대한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5. 설교로 어떤 신앙 공동체를 세울 것인가?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의 전략을 모색하는 로널드 알랜(Ronald Allen)에 의하면, 지난 20세기 말의 설교학 운동은 어떻게 하면 청중 개개인으로 하여금 설교를 효과적으로 듣도록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문화인류학의 통찰을 통해서 해결하는데 집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설교를 통하여 올바른 공동체를 세우고자 한다면 바람직한 설교에 대한 고민의 해답은 교회론(ecclesiology)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대한 신학적 인식에 따라서 그 정체성을 실현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설교에 대한 논의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설교 메시지가 선포되는 신앙 공동체의 신학적 정체성을 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 속에서 정리한 다음에 이어서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세우기 위한 필수적인 구성 요소(진리, 관계, 임무)에 대해서 계속 살펴볼 것이다.

1) 하나님 나라와 신앙 공동체

교회의 올바른 정체성은 교회가 시행하는 여러 목회 사역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의 연관성 속에서 결정된다.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안에서 실현되었으며 장차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현 역사 속에서 자신의 다양한 사역 활동들을 통해서 축하하고 증거하고 선포하고 소망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모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를 이렇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공동체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교회가 행하는 목회 사역의 한 유형인 설교의 목표 역시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며 그 공동체를 세우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의 연관성에 대해서 화란의 실천신학자 야곱 피렛(Jacob Firet)은 설교나 예배, 교육, 봉사와 같은 다양한 목회 사역들이 이뤄지는 신앙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시며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통로이자 방편을 제공한다고 한다. 피렛의 목회신학을 설교에 적용한다면,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그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계시되고 그 설교 사건을 통해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시며 임재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실현되는 것도,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모임으로서의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배경과 상황을 형성해 주기 때문이다. 앙 공동체 내에서 진행되는 목회 사역은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을 중재하는 방편이며, 거꾸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는 이 중재사역을 실현시키는 결정적인 수단이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모임으로서의 신앙 공동체가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그 나라의 구원을 만끽하도록 하는 설교와 교육과 상담도 불가능한 셈이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각 개개인의 삶 속에서 개별적으로 깨달아지고 적용되며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교회 교육이 가능한 것도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가 그 교회 교육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또 신자 개개인이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구원과 위로를 통해서 개별적인 고난을 극복해 가도록 안내하는 상담이 가능한 것도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가 그 상담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 공동체의 지원이 하나님 나라 성취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다고 말할 때, 그 신앙 공동체의 지원 활동은 인간 사역자들이나 신자들의 노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피렛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성취를 위한 신앙 공동체의 지원 활동이 의미하는 것은, 교회의 다양한 목회 사역들을 방편 삼아서 이 땅에 자신의 나라를 가져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기능하는 기본적인 기능 방식을 가리킨다. 즉 말씀 속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선포하시며 드러내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모임인 신앙 공동체를 세상을 향한 하나님 임재의 방편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신앙 공동체가 단순히 인간 신자들의 모임이나 집합체가 아니라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축하하고 증언하는 다양한 목회 사역들을 방편 삼아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자신을 가용한 상태로 알리시며 그 임재를 이 땅에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신앙 공동체의 목회 사역 속에 현존하는 성령 하나님의 프락시스에 대한 피렛의 통찰은 본 회퍼에게서도 확인된다. 본 회퍼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례전으로만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그 자체로 현존하신다고 한다. 본 회퍼의 입장은 일치와 구별의 이중적 입장을 동시에 견지해야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지나치게 일체화시키는 약점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정초한 교회의 존재 의미가 교회의 실제적인 사목 활동을 통해서 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다는 사목 활동의 거룩한 의미와 가치를 귀중하게 인식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준다. 그래서 설교도 그리스도의 현존과 연결시켜서 단순히 인간 설교자가 하나님에 관하여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현존하시는 한 가지 양식으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는 교회의 말씀 속에서 임재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말씀이라는 양식으로 이 세상에 임재하신다. 그래서 설교라는 양식을 방편 삼아서 존귀하신 그리스도와 비천하신 그리스도가 모두 설교에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의 존재 양식인 설교와 성찬이 하나님의 임재의 통로가 되는 셈이다.

공동체적 설교를 강조하는 찰스 켐벨도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신앙 공동체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의 예수의 임재를 위한 시공간의 근거와 기초의 역할을 한다. 교회는 다시 말해서 이 세상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한 예수의 간접적인 임재를 구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동체적인 설교를 통해서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자 할 때 설교자는 공동체의 본질이나 그 주역은 인간 설교자나 청중이 아니라 바로 말씀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며 이 땅에서 선포되고 증언되는 말씀을 통해서 이 땅에서 자신의 나라를 세워 가시는 하나님 자신이 그 공동체의 주인공이며 공동체 활로의 원동력임을 명심해야 한다.

2)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의 구성 요소

공동체적인 설교를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를 세우고자 할 때 설교자는 공동체 존립의 토대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이 공동체가 자신의 모습을 이 땅에 드러내면서 공동체의 영적 본질을 계속 지향하고자 할 때 ‘신앙 공동체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구성 요소들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공동체의 신학적인 정체성을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서 찾는다면 그 나라가 이 땅에서 공동체의 존재 양식을 통해서 구체화될 때 어떤 구성 요소들을 필요로 하는가?

에버리 덜레스는 그의 저서 『교회의 모델들』(Models of the Church)에서 교회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모델들을 소개한다. “교회의 모델은 제도적 교회, 신비적 영적 교제의 교회, 성례전적 교회, 선포적 교회, 그리고 종의 교회 모델이다.” 덜레스가 말하는 제도적 교회는 권위와 공동의 규범을 중시한다. 또 신비적 영적 교제의 교회는 가족적인 공동의 삶을 나누는 것을 중시한다. 성례전적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지시하는 제의적인 삶을 중시하며 선포적인 교회는 거룩한 이야기를 기억하며 이를 지속적으로 선포하고 재연하는데 초점을 맞추며 종으로서의 교회는 세상 속에서의 선교와 섬김에 초점을 둔다. 덜레스에 의하면 바람직한 교회는 이 모든 모형들을 통합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교회의 바람직한 기능 혹은 존재 양식은 말씀 선포(설교와 선교, kerygma)와 가르침(혹은 교육, didache), 친교(koinonia), 예배(leitourgia), 봉사(diakonia)로 모아진다.

이상의 다섯 가지가 교회가 자신의 하나님 나라 정체성을 역사 속에서 실제적으로 구현하면서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지켜가는 존재 양식이라면, 이러한 존재 양식들이 좀 더 공동체 지향적인 방향으로 구현될 수 있으려면 이 다섯 가지 존재 양식들이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신앙 공동체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구성요소로는 진리와 관계성, 그리고 임무를 지목할 수 있다. 즉 신앙 공동체가 이상의 다섯 가지 존재 양식을 통해서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실제 역사 속에서 구현할 때 그 존재 양식들이 좀 더 공동체 지향적인 입장에서 구현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진리”와 “하나님과 공동체 구성원 간의 관계맺음” 그리고 “공동의 임무에 대한 헌신”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씀 선포나 설교가 교회의 존재 양식 중의 하나라고 할 때 이 설교가 공동체적인 설교 사건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설교자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진리를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지속적으로 선포하며 구성원 모두가 그 진리를 자신의 진리와 생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구성원들은 하나님과 아울러 구성원 상호 간에 깊은 인격적 신뢰와 헌신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공동체 구성원 전체는 공동의 임무를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로 받아들이고 이 임무에 함께 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핵심적인 구성 요소가 갖추어질 때 이상의 다섯 가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신앙 공동체의 존재 양식들(예배, 교회교육, 설교, 친교, 봉사, 선교)은 좀 더 공동체 지향적인 관점에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7. 공동체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이야기

이 땅에서의 신앙 공동체의 목회 활동들은 말씀을 통하여 이 땅에 스스로 임재하시며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시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간접적인 임재 양식이라면, 그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비결도, 그 공동체가 얼마나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잘 붙잡고 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즉 공동체를 세우는 중요한 도구 중의 하나가 바로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공유하는 이야기이다. 세상에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특히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거대담론(metanarrative)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설교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 구원 역사에 관한 거대담론의 몇 가지 기능을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① 공동체의 이야기는 첫째로 공동체 구성원들을 서로 결속시킨다. 설교학자 칼빈 밀러(Calvin Miller)에 의하면 이야기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상호 관계를 결속시키는 “회반죽”(mortar)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그리고 인류의 역사 속에서 구원을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과거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과 현재의 백성들 그리고 미래의 백성들로 하여금 시간적인 벽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서로를 결속시킬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을 하나 되게 만든다. 시공간적으로 흩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서로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관한 거대담론이 모든 지체들을 하나로 결속시켜주는 회반죽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공동체 구성원들을 결속시키고 그 과정에서 현 실체를 새롭게 대응하는 공동체를 창조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여러 언어학자들과 설교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로드니 케네디(Rodney Kennedy)는 “The Creative Power of Metaphor"라는 책에서 메타포의 창조적 기능에 대해서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메타포 역시 공동체적인 언어 활동의 일부분이므로 공동체적인 내러티브의 기능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메타포의 기능에 대해서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케네디에 의하면 메타포는 설교에서 메타포를 함께 공유하는 자들 가운데 그들만의 독특한 성품을 창조한다고 한다. 둘째로 메타포는 공동체를 창조하는 기능을 하며, 마지막으로 메타포는 해당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는 개념을 창조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메타포와 이야기를 통해서 설교자는 청중들을 새로운 공동체 속으로 이끌어 들이면서 그들과 공동체를 서로 결속시킨다는 것이다.

“메타포와 친밀감의 증진”(Metaphor and the Cultivation of Intimacy)이라는 논문에서 테드 코헨(Ted Cohen)도 메타포가 어떻게 화자와 청자 사이에 결속력을 강화하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메타포를 제시하는 화자는 메타포를 통해서 청자나 청중에게 일종의 은밀한 초청을 제시하면 청자는 그 초청에 반응하고 수락하기 위하여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호 작용 과정에서 화자와 청자는 메타포를 중심으로 서로 결속하게 되고 하나가 되고 공동체적인 연대감이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메타포는 공동체에 속하느냐 마느냐를 구분하는 경계선의 기능을 한다.

②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는 이야기는, 둘째로 구성원 자신과 주변의 세상, 그리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인식의 창문 또는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이나 여러 현상들이나 사람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공동체가 그 사건들이나 현상, 혹은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해석의 틀을 제공하느냐에 따라서 무의해 보이는 사건들이나 현상들은 의미를 갖게 된다. 무의미 해보이는 사건들이나 인물, 또는 현상들이 독특한 의미를 확보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공동체의 이야기를 통해서 구성원들에게 전달되고 스며들며 동화되는 세계관 때문이다.

설교학자 로날드 알랜(Ronald J. Allen)에 의하면 세계관이 표현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 바로 이야기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특정 공동체가 왜 그 자리에 모이게 되었으며 무슨 목적으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해준다고 한다. 알랜에 의하면 공동체가 공유하는 이야기 속에 내포된 세계관은 다음 세 가지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한다. 첫째 공동체의 이야기에 깃들어 있는 세계관은 혼란과 죽음과 같은 위기에 직면했을 때 공동체에게 질서와 안정감을 제공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바벨론 포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 없는 비참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포로기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백성을 구원하실 여호와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선포하였다. 둘째로 공동체의 이야기에 깃들어 있는 세계관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정체성과 삶의 목표와 방향감각을 제공한다. 나는 누구이며 우리 공동체는 왜 이 자리에 함께 모였는가? 셋째로 공동체의 이야기에 깃들어 있는 세계관은 사회적인 삶의 이유와 방향을 제시한다고 한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이야기 속에 담긴 세계관이 이렇게 중요한 기능을 감당하기 때문에 특별히 세속 사회 속에서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위기에 직면한 현대 교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회복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는 학자가 바로 월터 부르그만(Walter Brueggemann)이다. 월터 부르그만은 Finally Comes the Poet(1989), Texts under Negotiation(1993), Cadence of Home(1997)과 같은 저서들에서 현대 세속 사회 속에서 정체성 상실의 위기에 처한 현대 교회의 실상을 파헤치면서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부르그만에 따르면 오늘날 교회는 마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영적 정체성을 상실할 위기에 직면했던 포로기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슷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가 감지되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교회는 바벨론 포로기 때나 지금이나 다음 세 가지 반응을 나타낸다고 한다.

첫째는 동화의 반응(to respond in assimilation)으로서 세상의 유혹을 그대로 수용하고 세상과 동화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무력함과 바벨론의 위력 사이에서 하나님의 패배를 확인하면서 깊은 절망에 빠지는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에 대한 과거의 전통을 무기력하게 포기하거나 맹목적이고 기계적으로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과거의 전통을 새로운 환경 속에 대입시켜보면서 새로운 상황에서 제기되는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계발시켜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위기에 직면한 공동체로 하여금 신학적 정체성을 고수하면서도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자신들 공동체와 주변의 세계와 하나님의 섭리를 새로운 환경 속에서도 창조적으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포괄적인 해석의 틀이 그 이야기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③ 신앙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는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는, 셋째로 하나님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기대와 경험이 개인적인 관심사로 흩어지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공동체적인 반응과 경험으로 승화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신앙 공동체의 종교 활동과 공동체 구성원의 종교적 경험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데 조지 린드벡(George Lindbeck)의 견해가 유용하다. 조지 린드벡은 1984년에 출간된 『교리의 본질: 탈자유주의 시대의 종교와 신학』(The Nature of Doctrine: Religion and Theology in a Postliberal Age)에서 종교에 대한 문화-언어적 이론(a cultural-linguistic theory of religion)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종교의 독특성은 일련의 인지적인 명제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또는 언어로 표현되기 전의 인간의 경험들에 대한 독특한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문화적 관습이나 공동체의 언어 관습을 통해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종교 활동 속에는 인지적인 요소들(ex. 교리나 신앙고백문들, 신학적 명제들)이나 체험적인 요소들(ex. 기쁨과 슬픔, 절대자와의 만남, 결단)이 포함되지만, 린드벡에 의하면 종교의 특징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인지적 요소나 체험적 요소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화적 관습과 언어적 관습을 통해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빚어내고 있는 공동체의 포괄적인 문화-언어적 체계(cultural-linguistic frame)라고 한다. 린드벡은 종교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종교는] 진리와 선에 대한 (일련의 믿음을 담고 있을 수도 있으나) 일련의 믿음으로 정의될 수도 없으며, 또한 종교를 통해서 기본적인 느낌이나 정서들이 생겨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인간의 기본적인 느낌이나 정서를 표현하는 일종의 상징체계(symbolism)도 아니다. 오히려 종교는 흡사 특정 실체를 묘사하도록 도와주며, 믿음을 명료하게 만들어주며, 내면의 입장이나 느낌, 그리고 정서 같은 것들을 밖으로 표현하도록 안내해주는 일종의 관용어법(idiom)과 같은 것이다. 종교는 문화나 언어처럼 개개인의 내면적인 주관성들이 외부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개개인의 내면적 주관성들을 형성하고 빚어내는 공동체적인 사회 현상이다. 종교는 독특한 논리나 문법체계와 아울러 추론적이며 동시에 비추론적인 상징들의 표현 수단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다양한 상징적인 표현 수단들은 오직 해당 종교의 독특한 논리와 문법체계를 통해서만 의미 있게 활용될 수 있다.

공동체의 종교 활동과 외부적인 경험의 상관관계와 관련하여 결국 린드벡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종교는 다양한 종교적 활동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을 자극하여 어떤 것을 경험하도록 자극하고 유도하는 일련의 공동체적인 활동(종교에 대한 경험 표현주의적 모델, experiential-expressivist model)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역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내면적인 경험을 공동체의 가치관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독특한 언어 관습과 사회적인 활동(종교에 대한 문화-언어적 모델, cultural-linguistic model)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를 이렇게 이해할 때 결국 문화적 활동이나 언어 관습으로 대표되는 공동체의 해석 체계가 우선인지 아니면 인간 내면의 다양한 경험들이 우선인지를 따져볼 수 있으며, 문화-언어적 종교 모델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문화-언어적 공동체 안에서의 사회화의 과정 또는 문화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신자가 구원을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의미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의 경험과 이해, 그리고 삶을 형성하는 언어 관습과 문화적 실천들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을 습득하는 과정이다.”

이상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는 이야기의 세 가지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공동체의 이야기는 첫째로 공동체 구성원들을 서로 결속시킨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는 이야기는, 구성원 자신과 주변의 세상, 그리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인식의 창문 또는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신앙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는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기대와 경험들이 개인적인 관심사나 개인적인 감정적 체험으로 흩어지지 않고 이야기 속에 깃들어 있는 해석 체계가 지향하는 방향대로 하나님에 대한 공동체적인 반응과 경험으로 승화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7.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의 전략

앞에서는 신앙 공동체의 목회 활동 속에서 이 땅에 자신의 나라를 증거하며 세워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데 중요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 역사에 관한 이야기(biblical narrative)임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부합하는 신앙 공동체를 효과적으로 세울 수 있는 구체적인 설교의 전략은 무엇일까?

1) 설교를 듣는 청중의 공동체적 상황과 임무를 설교의 과녁으로 정하라.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를 전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먼저 청중 전체를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 나온 개개인들의 집합체로 이해하지 않고 공동의 정체성과 공동의 상황, 공동의 목표를 가진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로 이해하면서 이들에게 선포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겠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설교의 주제나 목적으로서 신앙 공동체가 당면한 과제나 문제점으로는 예를 들어 해당 공동체 전체가 특정한 사건들(ex, 부흥회, 지역 봉사, 교회 건축, 새로 부임한 목회자, 교회 분립, 선교사 파송, 직분자 세우기)을 계기로 회중 전체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다시금 확인하거나 각오를 다지도록 하는 목적으로 설교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부정적인 사건이나 강단에서 언급을 회피하고픈 사건이 교회 내에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라도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 드라마의 관점에서 이런 부정적인 사건들을 재해석하여 부정적인 사건 속에 휘말린 신앙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 속으로 흡수되는 도약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래서 공동체 내에 발생한 사건이나 미래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부정적인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부정적인 사건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설교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들로 하여금 공동체 내에 임재하시며 그 공동체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설교의 중요한 목표여야 한다.

2) 하나님을 개인의 문제 해결자가 아니라 공동체 인도자로 선포하라.

개인주의적 설교의 약점 중의 하나는 신자들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모습이 개개인이 가진 사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나 또는 개인의 원하는 내용들을 성취하도록 도와주는 존재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모습 역시 개개인의 문제 해결사가 아니라 공동체와 해당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해서 독특한 목적과 사명을 부여하시며, 그 목적과 사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 공동체 구성원들이 하나된 유기적인 헌신 속에서 공동체를 목적지로 이끌어 가시는 분으로 선포해야 한다. 공동체 속에서 구성원들의 유기적인 헌신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때로는 공동체에게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어려운 과제를 부여하시는 존재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과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믿음과 신앙을 한 차원 더 높게 이끌어 가시는 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새로운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헌신과 인내를 요구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은 구성원에게는 개개인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기 이전에 공동체 전체를 섭리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으로 부각될 것이며, 섭리의 주이신 하나님이 멀리 허공 속에나 개개인의 내면에서 은밀하게 역사하시는 개인적인 문제 해결사나 나의 감정적 기복에 따라서 그 능력과 영광이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한 개인보다 더 큰 공동체 전체를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며 인도하시는 능력의 주님으로 다가올 것이다.

3) 성경을 개인의 내면적 문제 해결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공동체 완성의 지침서로 해석하라.

개인주의 설교가 사라지지 않는 원인 중의 하나는 성경을 청중 개개인의 내면적 문제 해결서로 간주하면서 성경에서 그 해결 원리나 지침을 뽑아내려는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개개인의 내면적 문제 해결서이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에게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완성에 대한 청사진을 제공하면서 그 나라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선포하며 그 나라 속으로 백성들을 초대하는 초청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언약 공동체를 부르셔서 그 공동체로 하여금 사랑과 진리의 모델이 되게 하신다. 이스라엘의 토라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공동체의 해석학적 렌즈를 통하여 읽혀질 때 비로소 참 의미를 살려내며, 그렇게 하여 토라의 성취는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경 본문을 해석하여 설교할 때, 본문 속에서 신자 개개인의 내면적 문제를 해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향하여 말씀하시고 통치하시는 모습에 주목하는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4) 공동체 정체성을 담고 있는 공동체 내러티브를 확보하라

설교를 통해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설교자는 공동체 세움에 내러티브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함을 고려하여 해당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을 이해하도록 안내하고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공동체 내러티브를 확보해야 하고 이를 설교의 핵심 자료로 활용하며 그 내용을 강단에서 지속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설교를 듣는 회중이 공동체 안에서 계속 만들어져 가는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공동체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기억하면서 그 내러티브가 제시하는 해석적인 렌즈를 매개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사실적으로 기억하고 경험하며 해석하고 소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제임스 호프웰(James Hopewell)에 의하면 특정 공동체만의 독특한 정체성은 그 공동체가 사용하는 상징물이나 관용구, 관습, 말씨, 언어 방식, 예전, 이야기 등등의 다양한 문화적인 표현 양식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공동체 내러티브(communal narrative)를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공동체 내러티브는 하나님과 회중 상호간의 만남의 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물론 공동체의 내러티브의 과거와 미래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성경적인 내러티브(biblical narrative)에 비해서 종속적이고 가변적이다.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며 만들어가는 구원의 경험에 관한 이야기는 해당 공동체의 과거 역사 뿐만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 기준과 어떤 가치가 가장 바람직한 가치인지에 관한 가치관과 해당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미래상을 제시한다. 또 이 공동체 내러티브 속에는 하나님께서 특정 공동체를 어떻게 인도해 오셨고 앞으로도 어떤 가치와 사명을 향하여 공동체를 인도하시려는지에 대한 미래의 지향점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설교를 통하여 신앙 공동체를 세우려는 설교자는 해당 공동체 내에 형성되어 있는 공동체 내러티브를 지속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내러티브 공허하고 사변적인 내용으로 전락하지 않고 실제 공동체의 구원 속에서 거듭 확인됨으로써 신자 개개인의 구원에 관한 개인적인 내러티브로 확장될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후임 목회자의 경우에는 특정 공동체의 과거 신앙적 순례의 역사를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교회 요람이나 기록물, 또는 신자들의 여러 간증과 증언을 통해서 과거 순례의 역사를 파악하고 이해하며 그 순례의 흐름과 맥락을 파악하고 존중하며 이를 후임 목회자 자신의 개인적인 순례 여정과 통합시켜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새로운 비전으로 융합시켜서 과거의 순례 이야기와 앞으로의 새로운 비전의 이야기를 통합시켜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교회 구성원인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교회의 지난 역사와 앞으로의 사역의 방향과 목표를 간략하게 정리하여 그 내용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확인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5) 설교자가 공동체 리더의 위치에 서라.

개인주의적 설교에서 설교자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주로 영적인 교사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설교자는 영적인 진리를 신자 개개인에게 전수하는 교사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적인 설교를 위해서 함께 강조되어야 할 설교자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리더(divine leader)이신 하나님의 공동체적인 인도와 섭리를 섬기는 인간 리더(human leader)이다. 그래서 다수의 설교학자들에 의하면 설교자는 특정 신앙 공동체에 속한 청중으로 하여금 현 상황을 넘어선 곳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를 미리 듣고 맛보고서 그것을 청중들에게 제시할 줄 아는 선견자(Seer)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한다.

공동체적 설교를 위하여 공동체 지도자의 입장에서 설교를 할 때 리더에게는 공동체가 처한 현실에 대한 진단과 아울러 하나님께서 특정 공동체에게 기대하는 미래적인 전망이 담긴 비전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죠지 바나의 설명에 의하면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의 공통점은 교회 지도자와 회중이 사역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교회의 영적인 성장과 숫적인 증가가 반드시 뒤따르고 있다고 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특정 설교자를 통하여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에 대한 거룩한 비전과 열망은 설교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또 짐 니코뎀(Jim Nicodem)에 의하면 리더로서의 설교자가 설교 시간에 강단에서 다뤄야 할 것은 회중이 처한 현실을 진단하는 일과,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하는 일, 비전 완수를 위한 동기를 부여하는 일, 그리고 공동체의 비전 성취와 관련된 핵심 주제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일이라고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단순히 성경 교사의 위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 전체에 대한 영적 지도자의 입장에서 해당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을 분별하고 그 내용을 강단에서 지속적으로 선포할 뿐만 아니라 실제 목회 사역을 통해서 신자 개개인과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계속 진행되는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에 동참할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6) 비전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의사소통 전략을 수립하라.

설교자가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를 위한 인간 리더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할 때 중요한 구비요건이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는 이야기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담긴 비전임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와 아울러 설교자에게 더 필요한 것은 그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포괄적인 의사소통 전략이다. 공동체 리더로서의 설교자가 공동체가 달성해야 할 비전을 요약한 비전선언문을 만들고 구성원들에게 그 내용과 목표에 관하여 설교하더라도, 자동적으로 구성원들이 그 비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공동체가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리더의 리더십이 공동체 내에서 효과적으로 발휘되어야 한다. 존 가드너는 리더십을 가리켜서 “개인(또는 팀 리더십)이 자신의 목표나 아랫사람과 공유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설득과 모본을 통해 한 단체를 유도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가드너의 정의에서 주목할 점은 비전 성취를 위해서 중요한 전략이 바로 설득과 모본이라는 점이다. 비전 공동체를 세우려는 설교자에는 설득과 모본이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효과적인 의사소통 과정으로 발휘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는 특정한 개혁안이 공동체 내에서 확산되어가는 조직 소통 이론 (organizational communication theory)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에버렛 M. 로저스라는 사회학자는 그의 책 『개혁의 확산』(Diffusion of Innovation)에서 이 부분에 관한 유용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로저스는 특정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바람직한 개혁의 확산(diffusion of innovation)을 “하나의 개혁이 시간을 두고 사회체계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특정한 채널을 통하여 커뮤니케이션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로저스는 개혁을 받아들이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다섯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개혁자(2.5%)와 초기채택자(13.5%), 초기대다수(34%), 후기대다수(34%), 비개혁자(16%)로 구분한다. 다섯 가지 범주로 구분되는 개혁 채택자들은 개혁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다양한의사소통 통로의 영향을 받으며 제안된 개혁에 대한 반응도 서로 다르다고 한다. 먼저 개혁자는 모험심이 강한 그룹으로서 새 아이디어를 채택했을 때 미치는 손실을 파악하는 인지능력이 탁월하며 새 아이디어가 실패할 때 부과되는 위험을 기꺼이 감당할 능력과 의지가 강한 편이라고 한다. 이들은 개혁이 공동체 전체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문지기의 역할을 한다. 둘째로 초기채택자들은 개혁자들에 비해서 모험적 성향이 강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구성원들과 친화력도 높은 편이며 그래서 구성원들에게 강한 의견지도력을 발휘하는 그룹이라고 한다. 초기대다수는 개혁 확산에서 비교적 신중한 그룹으로서 개혁이 공동체 내에서 확산되어 평균점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개혁을 채택하는 중도계층이다.

로저스에 의하면 이렇게 다양하게 구분되는 개혁 수용 그룹들이 개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영향을 미치는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서로 다르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개혁의 확산 과정은 ‘지식단계’ - ‘설득단계’ - ‘결정단계’ - ‘실행단계’ - ‘확인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그런데 로저스에 의하면 개혁 진행 과정에서 주의할 점은 개혁의 확산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효과는 개혁 확산의 진행 과정에서 위계적이며 단계적으로 진행되며, 구성원 개개인의 입장에서 개혁안을 채택해가는 각 단계마다 서로 다른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관여하며 각기 다른 효과를 일으킨다고 한다. 먼저 개혁이 인지되고 실행되는 전체 과정에서 대중매체 채널은 특히 ‘지식단계’에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면, 대인 채널은 특히 ‘설득단계’에서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구성원 개개인이 개혁을 이해하고 실제로 수용하는 과정이 앞에서 언급한 다섯 단계 과정을 단계적으로 밟아간다면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개혁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간적인 과정은 먼저 개혁자들과 초기채택자들이 이해하고 수용하면(이들에게는 대중매체 채널을 통한 의사소통이 효과적이다), 그들이 개혁을 수용하는 모범을 지켜보면서 이어서 초기대다수와 후기대다수가 개혁을 수용하면서 시간에 따른 개혁 채택자들의 숫자는 S자 그래프를 그리면서 비약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개혁 확산이 궤도에 오르면 새로운 채택자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으면서 마무리단계에 도달한다고 한다.

로저스의 개혁 확산 모델은 비전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영적 리더/ 설교자에게 몇 가지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 먼저 리더/설교자가 공동체 전체의 갱신과 변화를 꾀할 때 공동체 내의 개혁에 대한 다양한 입장 차이(적극적인 지지, 동조, 회의적인 비판)를 나타내는 그룹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또 개혁을 이해하고 실제로 이행할 때 각각의 그룹들은 각기 다른 커뮤니케이션 채널(대중매체 채널과 대인 채널)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개혁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과정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한 사회적 과정이기 때문에 리더/설교자는 시기와 상황과 단계에 적절한 의사소통 전략을 발휘해야 한다는 점이다.

7)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선결요건과 진행 과정을 설교하라

신앙 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진단하여 올바른 비전 공동체로 성장해가는 전체 과정에서 현재 이 공동체는 어떤 상황과 단계에 위치해 있는지를 판단하여 그 단계에 어울리는 메시지를 설교한다. 신앙 공동체의 형성과 임무 완수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지속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체험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처음 단계에서는 예배의 회복과 활성화와, 공동체적인 회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방법,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말미암은 영적 변화에 대해서 설교한다. 이어서 공동체 내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가 충만해지고 구성원들이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힐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정적인 현상들을 예견하면서, 그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나 방안들도 중요한 설교의 주제가 된다. 예를 들어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칫 입장과 견해가 달라지면서 자신의 경험이 절대시되면서 다른 구성원들의 입장을 용납하지 못하고 분파주의가 팽배해질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신앙 공동체의 화해와 일치를 중요한 설교 주제로 다뤄야 한다.

우리 교회가 정녕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공동체로 거듭나고자 한다면 우리들끼리 먼저 화해하기 일치를 이뤄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비전을 받고자 한다면 그 이전에 우리는 먼저 서로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되지 못하고 우리 사이에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된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비전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비전을 받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세상 앞에서 우리가 먼저 하나되어야 합니다. 옆에 있는 형제 자매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좁은 생각으로 비평하고 무시하고 조롱했던 죄를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할 때 비로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주의 비전을 바라보게 하실 것이며 우리의 막힌 귀를 열어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는 주님의 사명을 듣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그 나라를 증거하고 소망하는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특정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있을 것이다. 리더/설교자는 그 과제를 직시하면서 설교를 통해서 구성원들이 그 과제 해결에 동참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설교의 방법을 위해서는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설교할 수 있고, 또 성경 각 권을 중심으로 연속 설교할 수도 있다. 설교의 주제와 특정 성경책은 공동체의 처한 상황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주제별 설교에서는 올바른 예배나 화해와 일치, 기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죄악을 이기기, 교회의 참 모습 등등을 설교할 수 있겠지만, 이런 주제들을 선정하는 일은 공동체의 처한 상황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또 공동체의 상황과 목적을 고려하면서 특정 성경책을 연속적으로 강해 설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공동체 내에 화해와 일치가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으며 구성원들 사이에 일치가 회복되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라면 설교자는 요한일서를 연속적으로 설교하되 전체 설교의 초점과 강조점은 일치를 염두에 두면서 설교할 수 있다. 또는 올바른 예배의 회복이 공동체 내에서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상황이라면 신앙 공동체가 올바른 자세로(또는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 과정을 중심으로 출애굽기나 민수기를 연속 강해할 수 있으며, 공동체의 조직적인 개혁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된 상황이라면 에스라 느헤미야를 연속 강해하거나, 전도에 대해서는 요나서를 연속 강해할 수 있다.

8) 설교의 적용점을 개인 윤리가 아닌 공동체 윤리의 차원에서 제시하라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께서는 당시 청중에게나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윤리적 반응을 기대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추구한 벤 위비(Ben Wiebe)에 의하면 예수의 메시아 윤리(Messianic ethics)는 그 윤리가 다뤄지는 윤리적 상황으로서의 신앙 공동체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윤리적 명령이나 훈계는 그 자체로 공허해져버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개인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이기 때문이다. 신약 윤리의 현대적 적용의 전략을 모색한 리처드 헤이스(Richard Hays) 역시 2천년 전에 기록된 신약성경이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될 수 있는 해석학적이며 윤리적인 패러다임으로서 십자가와 새창조, 그리고 공동체의 세 가지 초점 이미지(focal image)를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 절정에 도달하여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였다면, 십자가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는 그 복음의 윤리를 구현해내는 신앙 공동체를 통해서 가시화되며 신약성경의 복음과 윤리에 관한 메시지는 바로 이 세 가지 초점 이미지를 통과함으로 신앙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맞게 새롭고도 꾸준히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초점 이미지 중에서 특히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바로 설교의 적용점이 개인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윤리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신앙 공동체를 세울 목적으로 기록되었던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윤리적 명령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다운 통일성과 일관성을 확보하려면 이 윤리들을 개인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라는 렌즈를 통과하여 적용해야 하듯이, 오늘날의 설교를 통해서도 내면적인 갈등을 해결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려면 그 설교의 적용점 역시 개인적인 적용점으로서의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이행할 적용점을 제시해야 한다.

맺는 말

이상으로 현대 설교학과 설교 강단을 덮고 있는 개인주의 설교 현상을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설교의 본래 목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설교학적인 전략을 모색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영광은 오늘날의 무력한 설교자들의 웅얼거림과 전혀 다르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0-11).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온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다(요 3:16).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개인주의의 늪에 빠진 한국교회가 이 땅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올바른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위한 공동체 설교에 헌신할 수 있도록 교회 가운데 말씀과 함께 운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한국교회 강단에 함께 하소서!

논평

“개인주의 설교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의

논평: 오현철 교수(Ph. D. 성결대학)

1 요약

이승진 교수는 현재 한국교회의 설교 사역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그 실상을 설교의 목적, 메시지에서 강조되는 하나님 이미지, 설교에서 설교자의 역할과 청중의 역할, 설교전략과 적용 등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더불어 개인주의 설교의 유래와 폐해에 대해 정리한 후 설교를 통해 지향하는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와 연관 지어 설명하고 가톨릭 신학자 덜레스의 다섯 가지 모델을 그 존재양식으로, 진리와 공동체 구성원간의 관계맺음 그리고 공동의 임무에 대한 헌신을 공동체를 공동체 되게 하는 역동성으로 논리정연하게 제시하였다. 이후 연구자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서 내러티브의 역할과 가치를 피력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설교를 위한 전략을 설교의 목적, 공동체 인도자로서의 하나님, 공동체 완성의 지침으로서의 설교, 공동체 리더로서의 설교자, 공동체 윤리로서의 적용 등의 관점에서 매우 실제적으로 제시하며 글을 맺었다.

2 평가

1) 기여한 면

먼저 본 논문은 논지가 분명하고 논리전개가 시종 명확했을 뿐 아니라 논증도 피상적이지 않고 유관 학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충분히(20페이지) 다뤄졌다는 점에서 학문적 공헌도가 높은 ‘우수한 연구’임은 물론 독자들을 배려한(페이지로서는 아니지만) ‘친절한 논문’이다. 특별히 개인주의 설교의 실상을 입증한 방식이라든가, 그것이 주는 폐해에 대한 분석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서 결코 짧지 않은 분량의 논문이지만 논평자가 저자의 논지를 무리 없이 따라가고 결국 동의하기에 충분히 명확했다.

둘째로 본 연구는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하여 최근 마치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절대적인 대안(the alternative)이나 모두가 받아들이는 규범적 유행처럼 여겨지는 신설교학운동이 제시하는 설교방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그 취약점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신설교학운동이 전달 면에서는 한국교회와 설교학계에 신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이교수가 지적한 대로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데는 부족했다고 보기 때문에 신학적 숙고 없이 무조건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이는 유행에 민감한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주위를 환기시키고 설교에 있어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표적으로 삼을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줬다는 점에서 본 논문은 또 하나의 공헌을 한 셈이다.

셋째로 본 논고의 가장 큰 공헌은 아무래도 구체적인 설교 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그 전략에는 다 들어가 있다. 설교의 목적(과녁)이 무엇이어야 하고, 하나님은 그 설교 속에서 누구시며, 성경은 어떻게 중심을 잡으며, 설교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고, 설교자는 누구며, 소통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구체적인 진행과정은 어떤 모습이고 설교는 어떻게 끝맺어야 하는지(적용)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 굳이 말해야 한다면 청중? 청중은 이 공동체적 설교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괜찮다면 이 깊이 생각하지 않은 질문 아닌 질문에도 답변해 주면 좋겠다.)

2) 아쉬운 면

학문적 그리고 실천적 공헌도가 높은 논문에 감사하면서 시간과 지면의 제약 그리고 논평자의 우둔함으로 혹 연구자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 몇 가지 질문을 통해 보충설명을 듣고 싶다.

첫째, 본 연구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회중의 변화와 공동체의 성숙을 충분히 이끌어내는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사실 그렇지 못하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혹 연구자가 개인의 성숙과 공동체의 성숙을 이원론적으로 보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진다. 개인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선다면 공동체의 성숙은 마땅히 결과 되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동체가 아니라 개개인의 크리스천이 성숙하지 못한 것이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보진 않는지?

둘째, 2페이지에서 연구자는 신설교학운동이 무기력한 강단과 변화 없는 회중석에 변화의 새바람을 일으켰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질문하면서 여러 학자들을 인용해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이 대목이 자칫 신설교학운동은 아무 일도 안 하고 교회에 피해만 주었다는 것 같이 들린다. 신설교학운동은 분명한 공헌이 있었다. 설교의 내용만큼이나 그동안 간과했던 설교의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시대와 청중의 변화라는 외부적 요인만 아니라 성경의 기록방식과 저자의 의도라는 내부적 요인을 통해 탁월하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설교학운동이 태동할 당시에는 공동체성이 문제가 아니었고 개인이 문제였다.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개인들, 성경에 익숙한 그들에게 더 이상 새롭지도 감동적이지도 않게 전해지는 설교형식의 문제로부터 식상해 하나님말씀으로서의 설교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교회에서 탈락되어가는 개인들에 주목했었다. 때문에 지난 40년간 그들이 이룬 성과는 그 개인 개인이 다시 변화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주목하도록 했느냐 못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공동체성이 약해졌는데 그건 설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거대담론이 사라진 시대적, 사회적 원인과 성경에 익숙하지 못한 세대가 교회 안에 많아지면서 교회 내에서도 거대담론이 다시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책임을 신설교학운동에만 전가해서는 안 된다.

셋째, 개인주의 설교의 실상을 설교의 서론과 설교의 적용만 봐도 알 수 있다며 구체적인 예문과 함께 설명한 것이 이해하기 쉬어 참 좋았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설교한다면, 즉 “오늘은 우리 공동체가 직면한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설교하겠습니다.”로 설교를 시작해 “오늘부터 진행되는 지역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시기 바랍니다.”로 설교를 마치면 설교라기보다는 광고나 정치적 코멘트(최근 화제가 되었던 설교비평서의 제목처럼 ‘선동’이라는 표현까지는 쓰지 않더라도) 또는 집단의식이나 집단주의의 잦은 표출로 회중에게 전달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가 있다. 지나치게 공동체성을 강조한 나머지 오히려 한 개인으로서의 신자를 소외시킬 수도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따라서 빈도문제가 나와야 하는 건 아닌지? 공동체적 설교를 매주 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넷째, 본 논문이 규정하는 공동체는 교회공동체, 신앙공동체다. 그러나 공동체라는 개념과 공동체성이라는 정신자체가 교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한정된다면 그 의미가 희석되는 것은 아닌가? David Bosch가 말한 것처럼 교회는 타자와 함께 하는 교회(church with others)고 세상(church in the world)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공동체의 경계는 교회 벽을 넘어서야 하는 게 아닌지? Douglas Hall이 말한 것처럼 교회는 대안공동체(an alternative community)가 되고 혹은 대조문화 공동체(counter‐culture community)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지? 그렇게 보다 큰 공동체로서의 세상을 전제해야 되는 것이 아닌지?

본 연구가 앞서 얘기한 중요한 공헌들 외에도 매우 시의적절하고 특별히 설교의 공동체성 회복을 통해 한국교회의 변화와 성숙을 소망하며 우리의 동역자 된 이 땅의 설교자들에게 본질적이면서도 실천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제2회 개혁주의 설교학회 설교학 학술대회 논문집

설교가 한국교회 부흥에 미치는 영향”

지은이 / 권성수 허도화 이철승 이우제 마문철 이승진 오현철

묶은이 / 박진석 외 개혁주의 설교학회 편집

펴낸이 / 권성수

펴낸일 / 2009년 5월 11일

인 쇄 / 예손그리너

주 소 / 151-600 서울관악구 서울관악우체국 사서함 19호

가 격 / 학술대회 강의 논문집(비매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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